엄마의 기록 #3
밴쿠버의 여름, 밖으로 나가지 않는 자, 유죄다.
4월에 며칠 동안 갑자기 30도가 넘은 해도 있었지만, 보통 6월까지는 비가 오거나 선선한 기온이 유지되고 7월이 되면 월화수목금 햇볕은 쨍쨍 모래알은 반짝인다는 일기예보가 시작된다. 여름을 알리는 신호다. 어떤 해는 10월까지 화창한 날씨가 이어지기도 했지만, 보통 8월까지가 여름날의 피크, 9월부터는 가을날씨에 근접해진다.
여름이 두 달 남짓 짧은 만큼, 우리의 시간은 반짝여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더 바짝 놀아야 한다.
지난 7월 어느 주말, 우리의 선택은 U-Pick이었다.
Langley*에 있는 Kraus Berry Farms를 찾아갔다. 어떤 것이든 아주 알짜베기 정보만 알고 있는 베트남 친구의 추천을 받아 간 곳이라, 무한 신뢰와 기대가 있었다. 이곳은 예약을 받지 않고 선착순으로 손님을 받기 때문에 서둘러야 했다. 그러나 나와 아이 단둘만이 아닌 오랜만에 남편도 함께 하는 소중한 시간이기에 아침 브런치를 포기할 수 없었다.
Langley*: 21개의 지자체로 이루어진 메트로 밴쿠버 도시 중 하나. 밴쿠버 도심에서 45km 동쪽에 위치한 도시로, 차로 이동 시 1시간 정도 소요됨.
일전에 내가 혼자 방문했던 곳이었다. 샌드위치 비주얼도 흡족스러운데 배가 그득해지는 양에 맛까지 훌륭했고, 무엇보다 그때 먹었던 깊은 라떼의 맛을 잊을 수 없어서 다음에 가족들을 데리고 꼭 다시 와야겠다 생각했었다.
지난번에 궁금했지만 시켜보지 못했던 메뉴들을 고르고 혹 음식은 맛이 없더라도 라떼는 즐기고 가겠다는 마음으로 기대하며 시켰는데, 한 모금 마시고 컵을 내려놓았다. 차가움에 가까운, 에스프레소가 애매하게 들어간 우유를 마시는 것 같았다. 맛에 민감하지 않은 나에게도 큰 차이가 느껴지는, 일관되지 못한 커피. 음식 장사에서 맛이든 양이든 일관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다 보니 실망이 컸다. 앞으로 다시 방문하지 않아도 아쉽지 않을 것 같다.
세상은 넓고, 맛집은 많다!
오전 10시 30분쯤 농장에 도착했을 때 예상대로 주차장이 만차에 가까웠지만, 더 이상 입장이 불가능하다는 안내는 없었다. 입장권을 따로 구입할 필요는 없었지만 대신 한 사람당 하나씩 바구니를 구입해야 했다. 단, 3세 이하는 무료.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있었다 :
작은 바구니 (1리터, $6)
중간 바구니 (4리터, $16)
큰 바구니 (8리터, $33.50)
라즈베리 밭은 마켓 바로 옆에 위치했지만, 블루베리 밭은 셔틀을 타고 이동해야 했다. 도착하니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모를 블루베리 밭이 펼쳐졌다. 전체 면적을 보았을 때 빨간 줄로 구별되어 있는 ‘재배 가능 구역‘이 상대적으로 작아 보였지만, 가족별 혹은 함께 온 그룹 별로 한 줄씩 통 크게 배당해 주었다. 아이가 있는 입장에서 너무 좋은 조건이었다. 가만히 앉아 블루베리를 따고 있을 2살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주위에 불편함을 주지 않을까, 다른 사람 바구니에서 블루베리를 퍼먹지 않을까 하는 걱정들을 접어둘 수 있었다.
하........ 지금까지 내가 마트에서 샀던 블루베리는 다 무엇이었단 말인가! 이 빛깔, 크기, 맛! 감탄의 연속이었다. 입안에 쏙쏙 들어가 톡톡 터질 때마다 일과 육아로 지친 몸의 피로를 팡팡 터트려주는 것 같았다. 평소 뒤에 ‘베리'가 들어간 모든 과일을 좋아하던 아이는, 처음엔 나무에서 보이는 대로 따 먹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바구니에서 집어먹는 것이 편하다는 것을 깨닫고 잔디를 쿠션 삼아 작정하고 앉아서 먹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조금 채워지는 듯하면 없어지고, 오! 채워진다! 하면 다시 바닥이었다. 그래도 뭣이 중하랴. 사방 천지가 블루베리로 가득한 걸!
“괜찮다 아가야, 많이 먹거라, 노동은 엄마가 하마!”
열심히 수확했지만, 아이도 우리도 더 열심히 먹는 바람에 바구니는 가까스럽게 채워지고 있었다. 날은 점점 뜨거워졌고, 아이는 모자, 신발, 양말도 다 벗어던지다 못해 얼굴까지 벌게진 모습으로 “엄마, 이제 가자, 가자" 하며 매달리기 시작했다.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농장 한켠에 기념품과 재배한 베리들로 만든 각종 식품/제품을 살 수 있는 마켓, 그리고 음식을 사 먹을 수 있는 간이매점이 있었다. 보통 이런 농장에서는 과일의 질이 ‘주(主)‘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곁들여 파는 음식은 페스트 푸드점 정도의 수준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 지금까지 내가 먹어 본 감자튀김 중 단연 최고라 말할 수 있었다. 입덧했을 때 감자튀김 밖에 못 먹어서 사실 감사했을 정도로 좋아하는데, 다음에는 베리를 따러 오는 게 아니라 이걸 먹으러 다시 와야겠다 싶을 정도였다. 베리주스도 베리 조금, 시럽 잔뜩, 얼음 가득으로 만들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무것도 첨가되지 않고 그냥 얼린 베리를 한껏 넣어 갈아주는 스케일에 한번 더 놀랐다. 옆 테이블에서 시킨 옥수수 피자는 옥수수랑 치즈가 빵 밖으로 흘러넘쳐서 빵이 보이지 않을 정도... ’객(客)‘이라 생각했던 매점 음식의 질까지 챙기는 모습에, 여기 사장님 이 사업에 진심이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후 2시가 넘어가니 온도가 더 올라가서* 고민을 했지만, 라즈베리를 포기할 수 없었다. 아이의 의사를 물어보니 괜찮다고 해서 빠르게 이동했다. 나의 한탄은 다시 시작되었다. “아....... 지금까지 내가 마트에서 샀던 라즈베리는 무엇이었...!” 마트에서도 나름 좋은 것을 고른다고 열심히 골라도 맛이 밍밍하거나, 너무 시거나, 하루만 지나도 쪼글이가 되어 있었는데, 라즈베리가 이렇게 달고 싱싱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탄에 또 감탄을 연발하며 태어나서 베리를 처음 먹어본 촌뜨기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밴쿠버의 여름은 평균적으로 저녁 9시 이후 해가 지기 때문에 정오가 아닌 오후 3-4시가 가장 뜨겁다.
하루종일 베리 과다복용으로 배가 꺼질 틈이 없던 날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코에 손을 대고 확인해야 할 정도로 아이는 숨소리도 내지 않고 단잠을 잤다.
그렇게 더위를 이겨내며, 그러나 함께 꺄르륵 웃고 먹고 떠들고 뛰어다니며 수확한 블루베리와 라즈베리는 요거트 토핑으로, 과일 샐러드로, 홈메이드 머핀, 티라미수, 아이스크림으로 그 모습을 바꿔가며 매일매일 우리에게 신선함과 먹는 즐거움을 선사해주고 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아이가 없는 여름이라면 나는 무엇을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