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기록 #2
아무런 방해 없이 잠시 멈춰있고 싶은 순간이 있다.
해질녘, 그 어느 시간.
어떤 색감이 내 마음의 눈을 사로잡고, 그 순간 어떤 감정이 드는지 쉬이 설명할 수 없다. 그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 장면 속에 살아 숨 쉬며 일렁인다는 사실에, 잔잔한 미소가 번진다.
그곳에, 그 시간에 홀로 머물러 있어도 마음의 헛헛함 없이 고요하고 평안하다.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은 소중한 순간이다.
지긋이 보게 된다.
언제 이랬을까. 심지어 내 아이가 맞나 싶을 정도로 낯설다.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아이의 모습과 너무도 다르게 느껴지는 '더' 어릴 적 아이의 모습을 보며, 그 순간에 남긴 사진이 아니었다면 과연 내가 그때의 아이 모습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이에게 사진을 보여주며 물어본다.
"이게 누구인지 알아?"
"응, 아기."
하루라는 시간은 아침의 알람이, 부지런히 움직이는 시곗바늘이, 조양과 석양이 한 치의 오차 없이 알려주지만, 아이의 시간은 분명 내 앞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는데, 잠시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 부쩍 큰 아이의 모습으로 나에게 마법을 부린다.
언제 이유식을 할까 했던 게 벌써 혼자 숟가락으로 밥을 떠먹고 있고, 언제 아장아장 걷는 모습을 볼까 했던 게 저 멀리 뛰어가고 있고, 언제 "엄마"라고 불러줄까 했던 게 이제는 "엄마 사랑해요" 말하며 나를 꼬옥 안아준다.
"엄마, 이제는 제 삶을 살아볼게요" 하며 내 품을 떠날 날도 왜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은지.
언젠가 엄마가 말했다. 엄마의 기억 속 애틋해서 더 선명한 언니의 어릴 적 모습이 있다고.
두 돌을 갓 넘긴 언니가 낮잠을 자는 동안 읍내에 급한 볼 일을 보러 가야 했던 엄마는 아직 기어 다니지도 못하는 나를 업고 집 밖을 나왔다. 아이를 혼자 두고 나오는 마음이 어찌 편했겠냐만은, 버스도 잘 들어오지 않는 시골이라 조급한 마음 안고 천리길 만리길처럼 느껴지는 그 길을 종종걸음으로 가야만 했다. 서둘러 돌아오는 길, 골목에서부터 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허겁지겁 대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언니는 마루에 앉아 힘 빠진 목소리로 "엄마, 엄마" 부르고 있었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언니의 눈물은 이미 말라 있었다.
그날의 젊은 엄마, 어린아이를 떠올리던 엄마는 눈시울이 붉어지다 이내 눈물을 흘렸다.
왜 자식을 떠올리는 엄마의 기억에는 가슴 미어지는 순간이 더 깊이, 더 오래 남는지. 왜 아이라는 존재는 엄마에게 그렇게 애잔한 것인지.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게 무색할 만큼 나에게도 이미 그런 기억들이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다.
함께 웃었던 날이 더 많은데도, 눈물지었던 그날, 아이가 다쳐 전전긍긍했던 그날들이 마치 '나는 부족한 엄마야' 라고 되새겨주는 주홍글씨처럼 마음에 콕 박혀있다. 그래서 슬프고, 미안하고, 또 어떤 사고가 일어나지 않을까 불안하다가도 '이 모든 것이 다 인생의 조각들 아니겠는가' 하며 툭툭 털어내고 다음을 살아간다.
기억이라는 나만의 카메라, 그 안에 담긴 필름 속 아이의 희로애락. 그 모든 장면을 품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아픔이 아닌 엄마로서 가진 큰 특권일 것이다.
오늘도 너는 나에게 그 어느 것보다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기에 잠시 멈춰있고 싶다.
아니, 오래 머무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