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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t a Fan Nov 03. 2024

익숙함에 고달프고 슬픈

엄마의 기록 #11

새벽 4시, 알람이 울린다. 오늘도 고양이 걸음으로 방을 나온다. 아무리 사뿐히 걸으려 해도 우리 집 마룻바닥은 눈치 없이 삐그덕 거린다. 어떤 날은 무사히 탈출하지만, 어떤 날은 “엄마 어디 가” 하는 소리에 내 발목이 턱 붙잡힌다. 요령이 없던 시절에는 안쓰러운 마음에 가서 안아주기도 하고 다시 침대로 기어 들어가 자는 척하기도 했지만, 이 행동들이 아이를 더 깨운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젠 “응, 엄마 잠깐 화장실 다녀올게”라고 말한 후 자연스럽게 빠져나온다. 아이는 그 말에 안심하고 다시 잠에 든다.


거실 의자에 걸쳐 있는 옷을 들고 내려와 화장실로 향한다. 새벽 시간, 유일하게 불이 켜지는 곳. 작은 물소리, 옷 입는 소리조차 나지 않는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출근 준비를 마친다. 움직임의 경로를 최소화하기 위해 미리 현관 계단에 준비해 놓은 가방을 메고 문고리를 잡는 순간, 발 밑에 무언가 느껴진다.


우리 집 고양이도 하루를 일찍 시작하려나 보다.


집을 나선다. 10분 정도 걸어 버스 정류장, 네 정거장을 지나 스카이 트레인(Skytrain)역, 여기서부터 45분을 이동해 직장이 있는 밴쿠버 다운타운(Downtown)에 도착한다.


이른 아침에 이동 시간도 길다 보니 지상철을 타면 가장 먼저 “어디에 앉아야 잘 잘 수 있을까?“ 고민한다. 책 몇 줄 읽고 글 몇 줄 쓰다 보면 스르르 눈이 감긴다. 내려야 하는 정거장의 전 정거장 이름이 방송되면 절로 눈이 떠진다. 아직 몽롱한 정신을 붙잡고 출구로 향한다. 부지런히 걸어 출근 시간 5분 전 사무실에 도착한다.


아침 6시, 일이 시작된다. 오늘의 할 일을 확인한다. 그리고 나의 전투력을 결정한다. 우리 부서의 특성상 매주 역할이 바뀌는데, 그래서 어떤 주는 점심시간 외에 앉아 있을 틈도 없이 바쁘고, 어떤 주는 쉬엄쉬엄 지나가기도 한다.


오늘도 속으로 외친다.


오늘의 일은 오늘로 충분하다. 어제를 후회하지 말고, 내일을 앞서 걱정하지 말자!‘


오후 2시, 사무실을 나온다. 나의 퇴근길에 샛길은 없다. 목적지는 오로지 집. 출근할 때와 비슷한 속도로 걸으면 내 앞에서 신호등이 청신호로 바뀌고, 역에 도착하면 내가 타야 하는 방향의 지상철이 딱 2분 후 도착한다. 좋아하는 넷플 하나 보면서 기분 좋게 퇴근하고 싶지만, 집에 돌아가 소화해야 하는 빽빽한 스케줄을 위해 잠으로 에너지를 비축한다. 사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눈이 감긴다.


집에 도착하면 가방을 내려놓고 바로 강아지 산책을 나간다. 나를 너무 반겨주는 강아지에겐 미안하지만, 한 때 내 마음이 바쁘다 보니 함께 산책하는 시간도 아깝고 벅차게 느꼈었다. 그러나 이제는 하루 일과 중 유일한 운동 시간이라 생각하며 건강도 챙기고 생각도 비우려 노력하고 있다.


산책에서 돌아와 바로 저녁을 준비한다. 음식을 가리지는 않지만 어제 먹었던 것을 또 먹고 싶지 않아 하는 아이의 기호를 고려해 메뉴는 매일 바뀐다. 손이 야무지고, 빠르고, 요리하는 것을 좋아한다면 참 좋으련만, 그렇지 않기에  이 시간을 썩 즐기지 못한다. 그나마 꾸준히 버티는 이유는 내 손이 부지런히 재료를 손질하고 국을 끓일 때, 내 눈과 귀는 잠시나마 좋아하는 드라마로 즐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저녁 준비를 마친 후, 빠르게 샤워를 한다. 지금 하지 않으면 이따 아이를 재우며 함께 잠들었다가 새벽에 화들짝 놀라 깨는 끔찍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 곧이어 남편과 아이가 집으로 돌아온다. 저녁을 먹는다. 식사 시간 동안 아이가 기억하는 하루를 들어보거나, 아이의 재롱에 함께 웃으며 시간을 보낸다. 때론 식탁에서 물러나 밀린 빨래와 청소를 하기도 한다.


8시 30분 정도에 아이는 아빠와 샤워를 하고, 9시에서 늦게는 10시 사이 아이는 (바로 잠들면 좋겠지만 노래도 부르고, 자기가 하는 말을 따라 해라 시켰다가, 지금은 몇 시고 나는 누구인가 생각할 무렵) 잠에 든다. 그리고 나도 침대로 기어 들어가 바로 기절한다.


다음 날 새벽 4시, 같은 일상이 반복된다.



오늘도 지상철 자리에 앉아 잠 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문득 창문에 비친 내 모습이 보였다. 이제 하루가 시작되었는데, 이미 지쳐있었다.


감사함만이 가득했던 마음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아이를 두고 일찍 출근하며 괜스레 쓰렸던 마음도 어느새 내가 나갈 때 제발 깨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되어 있고, 오늘도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며 인정받아야지 했던 결심도 ‘적당히 하자‘ 로 변해 버린 현재.


익숙함이 모든 걸 안다고 자부하는 오만이 되고, 몸의 고달픔으로 삶에 대한 건강한 동기를 잃어버린 이 현실이 아이를 키우는 마음에도 동기화되어가는 걸 느끼며, 나는 이런 상태가 되기까지 왜 나 자신을 방치해 두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설렘을 잊고 또 잃는다는 것,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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