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앞뒤로 붙는 말들의 정책적 의미에 대하여
(김해보, 2025.2.12.)
문화+정책 이슈페이퍼 2025-2호(2025.2.12)
“The Fine Arts Debate and Strategies for Choosing the Right Policy Language - on the policy implications of the words that precede and follow the arts” (Hae-Bo Kim, Culture+Policy Issue Paper Vol 2025-02, 2025.02.12., Seoul Foundation for Arts & Culture)
이번 이슈페이퍼는 <순수-기초 예술 지원정책에서의 적절한 용어 선택 전략을 도출하기 위해 예술 앞뒤로 붙는 말들의 정책적 의미를 깊게 탐구하는> 긴 이야기입니다. 결론에 이르기 위해서는 우선 <순수예술에 대한 논쟁>과 <정책 언어의 한계에 대한 이해>라는 두 개의 큰 산을 넘어야 합니다. 정책 언어 안에서 예술이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는지를 시작으로 사람들이 예술에 대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생각들을 폭넓게 살펴보았습니다.
예술철학자 래리 샤이너는 “순수예술이 하나의 사회적 혹은 문화적 복합체로서 출현하는 과정을 추적”하여 “고대 그리스에는 순수예술이라는 말이 없었다”는 챕터로 시작하는 책을 쓰고는 『예술의 발명(The Invention of Art)』이라고 제목을 붙였습니다. 예술지원 정책의 일선에 있었던 행정가는 소위 보수-진보 정권에서 예술이라는 말 앞에 붙는 말이 순수-기초로 번갈아 바뀌는 장면을 목격합니다. 무엇이 예술이냐도 충분히 논쟁적인데 그것에 순수나 기초를 붙이고 적절한 지원 대상을 골라내는 것은 투쟁에 가깝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예술을 논하면서 우리말이 아니라, 서양 귀족들의 필요에 의해 발명되었다고 하는 “Art”라는 말과 개념을 일본 지식인들이 수입하면서 만들어 낸 “藝術(예술)”이라는 말로 논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과 개념과 현실이 서로 공유되지 못하고 논쟁은 공전합니다. 이참에 사전과 법령과 통계에 정의된 예술이 어떤 의미와 현상을 담고 있는지 알아봤습니다.
이렇게 <예술>이라는 말의 뜻을 그 연원을 살펴서 논쟁하다 보면 좀 허망하기도 합니다. 결국 어느 시대 누구의 생각을 어떤 언어로 표현한 <예술>을 이르는 것인지가 관건입니다. 이 글에서는 19세기 말~20세기 초 무렵 우리나라에 <Art>의 번역어로서 예술 또는 미술이라는 말이 들어왔던 시절의 풍경 몇 컷을 소개합니다. 우리나라 1세대 서양화가 중 한 사람인 김찬영(金瓚永, 1893∼1960)이 “미술은 요술(術)의 같은 부류”라고 생각한 순사군(巡査君)의 말에 소름이 돋았다(윤세진, 2008)는 얘기는 흥미롭습니다. 프랑스인 모리스 꾸랑(Maurice Courant)이 3,821종의 조선 도서를 수집하여 발간한 『韓國書誌(한국서지)』(1869)에서 예술류(藝術類)는 총 9부 중 제7부 기예류의 맨 마지막에 등장하고, <서지 2575. 帝王遺像(제왕유상)>이라는 채색도 외에 기중기 등 온갖 기구 도판들로 이루어진 <서지 2564. 當無有用(당무유용)>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런 편제에서 당시 “백가예술(百家藝術)”이나 “육예(六藝)”라는 말을 썼던 조선인의 예술에 대한 관념과 말이 지금 한국인과 다르지만 오히려 기술과 예술의 뿌리를 하나로 보고 Art라는 말을 썼던 유럽인들의 인식과 오히려 비슷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정호완은 『우리말의 상상력』(1991)에서 서양 철학자들이 언급하는 예술의 기능과 본질을 모두 담고 있는 순 우리말 <그림>의 원래 뜻을 풀어줍니다. “그림과 그리다”는 말에는 이미지를 그리는 것 뿐만 아니라 가상의 관념을 머리에 떠올리는 것과 그것을 갈망하듯 그리워하는 것까지 포함된 것이랍니다.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의 <예술>에 대한 생각을 정책에 반영하려면, <藝術> 또는 <Art>라는 말로 표현되었던 인간문화 현상에 대한 몇몇 (특히 서양인) 학자들의 주장에 기댈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이 <예술>이라는 말 안에 담아서 전하는 생각이 무엇인지를 파악해야 할 필요성을 재확인하게 됩니다.
문화예술진흥법이 2022년에 개정되면서 게임과 애니메이션까지 (문화)예술로 명시되어서, 이제 순수나 기초라는 말을 어떤 예술에다 붙여야 할지 더욱 난감해졌습니다. 예술계 안에서도 소위 <순수예술>이라는 말로 대중적, 상업적인 것과 차별화하려는 주장이 널리 동조되지 못합니다. 바이올리니스트 조윤범(신동아, 2010)은 ”비발디의 ‘사계’ 대중음악인가, 클래식 음악인가“는 질문을 던지면서 ”18세기의 고전파 음악은 이전 음악보다 더 ‘대중적’인 음악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나아가 ”쇼스타코비치가 행사용으로 작곡한 ‘페스티벌 서곡’은 순수음악이 아닌가? 또 대중음악 작곡가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만 작곡하는가? 영화음악이나 게임 음악은 어떤 범주에 넣어야 하는가? 스타크래프트의 웅장한 사운드트랙은 대중음악인가, 클래식 음악인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그의 말대로 이 분야가 오늘날 수요와 공급이 가장 많이 이루어지는 음악인데 소위 순수 음악가들에게 이를 멀리하게 할 합리적인 이유나 근거가 있을지 의문스럽습니다.
인간이 선사시대부터 행해 온 행위들 중에서 지금 예술이라는 말로 구분되는 것들 중에서 다시 “순수예술”을 골라내봤습니다. 이때 순수한 예술을 골라내는 기준은, “생각의 감옥”이 아니라 소통을 위해 선택한 “말의 새장” 안으로 예술이라고 인식한 현상들을 집어 넣고 의미를 부여한 사람들의 관념이 만듭니다. 순수예술을 나누는 기준으로 예술성, 영리성, 대중성, 정치성, 자율성 등이 주로 동원되지만, 어느 것 하나 합의될 수 있는 보편적인 기준이 아닙니다. 시대와 입장에 따라 그 순수함의 방향도 달랐고 표현하는 말도 달랐습니다. 우리는 유럽 학자들의 예술관에 기대어 순수예술을 찾으려고 하지만, 사실 공자가 “제자들아 왜 시를 배우지 않느냐!”며 던진 충고의 말 속에서 지금 순수예술 논쟁에 필요한 모든 단초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림”, “춤”, “놀이”와 같이 인간의 예술적 행위를 표현한 우리말에 스며 있는 상상력과, 한자 문화권에서 藝術이라는 말에 담은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좀 무의미할 수도 있는 순수예술 논쟁에서의 뜻밖의 소득입니다.
순수함에 이르는 세 가지 방법으로 빼기, 더하기, 나누기를 제시해봤습니다. 생명 없는 혼합물에 대해서는 물질의 순도를 높이기 위한 빼기식 접근이 일반적입니다. 생명이 있는 주체의 삶의 산출물 순도를 높이는 방법은 무언가를 제거하는 방식이 아니라 유기적인 생명 활동을 촉진할 수 있는 조건을 더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나아가 사회적 존재로서 의사소통 후의 순수함을 경험하려면 서로 대화에 사용하는 용어의 개념을 공유하여 나누고, 의도적으로 숨긴 사실이 없어야 합니다. “순수하게 예술을 지원하는 정책”이 사람들에게 정말로 순수하다고 받아들여질 수 있는 방법이 여기에 있습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순수예술이 구분이 아니라 오롯이 예술을 지원하는 “순수한 예술정책”일 것입니다. 순수예술을 위하는 순수한 예술 정책이라면 그 지원 대상이 되는 예술은 넓게 정의하고 보다 넓은 가치 확산 채널을 만들 수 있는 말을 사용해야 합니다.
예술의 가치는 사람의 마음과 세상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힘이 일로 바뀌는 데는 그 에너지를 한 방향으로 이끄는 “제약 조건”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론생물학자 스튜어트 A. 카우푸만이 제시한 “제약 일 순환(constraint work cycle)”으로 설명해봤습니다. 사회적 존재일 수 밖에 없는 예술이나 예술가는 사회 안에서 일을 해야 존속할 수 있습니다. 예술의 본질적 가치가 세상을 바꾸는 일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자기 공간 안에서만 완전히 순수하고 자유롭게 노는 것이 아니라, 관객과 규칙이 있는 “판” 위에서 놀아야 합니다. 그 판을 깔고 예술가를 판으로 이끄는 것이 바로 정책의 언어가 하는 일, 즉 “제약조건” 만들기입니다.
그 판에서 노는 예술의 순수함 중 무엇을 지향하든지 간에 그 순수함은 빼기가 아니라 더하기와 나누기 방식으로 더 높일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문화산업진흥과 순수예술진흥을 무조건 대척점에 놓고 구분하는 것이 예술을 위하는 순수한 정책이 취할 입장이 아닙니다. 예술가와 예술이 만나서 더 왕성한 활동을 통해 창작물의 순도를 높이도록 하는, 소위 더하기식 접근에 필요한 것은 자원과 다양성을 제공할 넓은 시장, 그리고 주체의 활동성을 높일 자율성입니다.
“OO 예술 ◇◇”정책을 예를 들면, “순수 예술 진흥”과 같이 예술의 앞뒤로 붙는 정책언어는 예술이 공공자원이 주는 에너지를 얻어서 일로 바뀌는데 필요한 제약조건을 만듭니다. 정책언어는 예술 앞에 OO을 붙여서 정책 행위 대상을 명확하게 하려고 합니다. 본질적으로 예술 자체가 명확하게 정의될 수 없는데 그 논쟁적인 개념을 더 좁고 명확하게 정의해서 해당 정책의 정확한, 또는 비난받지 않게 지원 대상을 골라는 과정은 논쟁의 연속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다가 정작 그것으로 ◇◇하려고 했던 뒤의 행위에 쓸 에너지가 소진되거나, 비난을 피하기 위해 애매모호하게 이것저것을 다 하게 되는 경우를 봅니다. 즉 예술 앞에 붙여서 뭔가를 골라내는 말보다 뒤에 붙여서 실천의 방향을 명확히 하는 말에 정책적 의미를 더 크게 두는 것이 말의 힘을 빌어서 예술의 가치를 일로 바꾸는데 효율적인 언어 선택 전략입니다. 이것은 순수 또는 기초 예술을 위하는 길은 예술가의 사회적 경로와 예술작품의 유통경로를 더 넓게 만들어야 한다는 현장의 목소리와도 통합니다. 기초예술이든 순수예술이든 Ai 예술이 판치는 시대에 인간의 예술로서 공공정책이 소중히 지켜 내야 할 것입니다.
[목 차]
0. 예술의 발명 vs. 정책언어의 선택
1. 예술의 정의 변화와 순수-기초예술 지원정책 논쟁들
2. “예술”이라는 말 _ 예술의 사전적, 법률적, 통계적 정의
3. “예술”이라는 관념 _ 예술에 대한 학자들의 생각
4. 동아시아에서 “Art”가 “藝術”로 불리게 되던 시절의 말과 생각들
5. “원시예술”부터 “Ai예술”까지, 예술이라는 활동들의 범주화와 수식어 붙이기
6. 예술 앞에 수식어들을 붙인 사람들이 주장하고자 했던 것들
7. 합의되지 못하는 순수성 논쟁들
8. 순수함에 이르는 세 가지 방법 : 빼기, 더하기, 나누기
9. 예술창작과 문화산업 진흥 법령에 이미 들어있는 정답
10. 예술의 에너지가 말의 힘을 빌어 일로 바뀔 수 있는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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