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김씨표류기>와 취미

농사는 취미가 될 수 있을까?

by 정지영

지금은 모르겠지만 80~90년대에는 학생기록부에 취미나 특기를 기록하게 되어있었다. 대부분 비슷한 내용을 적었다. 독서, 영화감상, 음악 감상 외 다른 답은 거의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걸 왜 적어야 하는지 이유를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고, 우리들도 취미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냥 적으라니까 대충 비슷하게 적고 돌아서자마자 잊어버렸다. 취미는 왠지 쓸데없고 사치스럽게 느껴졌다. 우리들의 진짜 취미는 '연예인(핑글, HOT 등) 따라 하기, 근황 조사, 쫓아다니기'였지만 아쉽게도 '덕질'은 취미로 인정받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오랜만에 국어사전에서 취미의 뜻을 찾아보았다.

취미趣味, 전문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즐기기 위하여 하는 일.

그렇다. 취미는 즐기기 위해서 하는 일이다. 돈을 벌기 위해서, 싫어도 해야 하는 직업과는 다르다. 물론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도 버는, 요즘 유행하는 말로 '덕업일치'를 이룬 사람들도 있다고 하지만 일단 내 주변에는 없다. 그들은 TV나 인터넷 아니면 건너 건너에 어딘가에 존재하나 보다. NBA 전 농구선수 줄리어스 어빙은 말했다.

"프로가 된다는 것은, 당신이 하고 싶은 모든 일을 당신이 하고 싶지 않은 날에 하는 것을 말한다(Being a professional is doing the things you love to do, on the days you don't feel like doing them.)."
직업이 되면 싫어도 해야 하는 일이 대부분이다. 더 이상 그 일을 즐길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취미 그 자체를 온전히 즐기기 위해서는 시간적, 경제적 여유를 갖춰야 한다. 또한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경험을 해봐야 한다. 취미, 보기와 달리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이론적으로 즐기기 위해서 하는 일이니 모든 것이 취미가 될 수 있다(당연히 불법적인 일은 취미가 아니라 그냥 범죄다). 농사도 취미가 될 수 있다. 농촌진흥청에서 2011년 낸 <취미적 도시농업 우수사례>에 취미적 도시농업의 개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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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보듯이 농사가 취미가 되기 위해서는 비영리적 이어야 한다.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작물을 키우거나 수확하는 그 자체로서 좋으면 취미로서의 농사가 된다. 수확물을 팔아서 돈을 번다고 해도 이익이 그리 크지 않다면(예를 들어 지인에게 팔아서 몇만 원 정도 번다고 해도) 취미적 농사가 될 수 있다. 이렇게 취미는 철저히 자기만족의 영역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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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에 개봉한 영화 <김씨 표류기>를 보면 취미적 농사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영화의 주인공 김씨는 자살을 시도했지만 의도치 않게 밤섬에 고립된다. 처음에는 섬에서 빠져나가기 위해서 기를 쓰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혼자 있는 삶에 편안해져서 오히려 외부인을 경계한다. 어느 날 인스턴트 짜장면 봉지와 그 안에 든 수프를 발견한 김씨. 안빈낙도의 삶을 즐기던 김씨는 짜장면을 먹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에 불타게 된다. 수프는 있지만 면이 없는 상태. 이제 면을 만들어야 한다.

오리배에 잔뜩 붙은 새똥을 본 김씨는 똥 안에 씨앗이 있을 수 있다는데 생각이 미친다. 씨앗을 구했으니 이제 밭을 만들어야지. 자고로 인간은 도구를 사용하는 동물 아닌가. 신용카드는 똥긁개가 되고, 자전거 안장은 곡괭이가 되고, 에비앙 페트병은 신발이 되고, 자살 당시 입었던 양복은 허수아비 옷이 되었다. 자갈과 잡초로 무성한 땅을 열심히 갈아 밭을 만들고(초보자 답지 않게 밭을 고르게 잘 만들었다. 이거 진짜 쉽지 않다), 똥을 심어 애지중지 작물을 키우던 김씨는 어느 날 허수아비 뒤로 삐죽 솟아난 옥수수를 발견하게 된다.

영화에는 정확한 시간적 배경이 나오지 않는다. 옥수수는 나중에 <인터스텔라>를 하면서 더 자세히 설명하겠으니 여기서는 중요한 것만 언급해야겠다. 옥수수는 일 년에 두 번 재배가 가능하다. 품종에 따라 다르기도 하지만 봄 재배의 경우 4월 중순에 파종(씨앗 심기)하고, 가을 재배의 경우 7월 상순에 파종한다.(서울, 노지 재배 기준 / 주석 1 참고) 파종하고 80~100일이 지나면 수확이 가능하다. 김씨가 새똥을 긁을 때는 반팔 러닝에 양복바지를 입고 있고, 싹이 났을 때는 팬티만 입고 있다. 4월 한낮이라고 해도 반팔이나 속옷만 입고 있기에는 춥다. 의상만 봐서는 아무리 빨리 잡아도 5월 중순이고 이때 옥수수나 다른 작물을 파종하기에는 늦다. 김씨는 어렵사리 만든 면에 수프를 비빈 후 고명으로 직접 재배한 오이, 당근, 완두콩을 얹는다. 완두콩은 3~4월에 파종해서 6~7월에 수확하고 당근도 3~4월에 파종해서 6~7월에 수확한다. 오이가 문제인데 새싹이 난 모를 따뜻한 곳에서 키운 후 옮겨 심어야 한다. 오이는 빼더라도 옥수수, 당근, 완두콩 씨앗을 5월에 심어서 7월~8월에 일괄적으로 수확하는 건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특히 날씨가 변수다. 일단은 영화적 장치라고 생각하자.

김씨는 수확한 옥수수 낟알을 빈병으로 빻아서 물을 붓고 반죽해 면을 만든다. 유튜버 쏫이 이것을 따라한 영상을 보면 절구로 찧는데 낟알이 자꾸 튀어 오르고 안 찧어져서 결국 믹서로 갈고, 물을 부어 반죽을 하는데 뭉쳐지지 않아 전분을 넣는다. 면을 삶았으나 수프에 비비는 순간 면이 뚝뚝 끊어진다. 무엇보다도 맛이 없다고 한다. 국수는 고운 가루로 만들어야 하는데 거칠게 빻아서는 면을 만들기가 힘들다. 강원도에서는 옥수수로 만든 국수를 올챙이국수 또는 올챙이묵이라고 한다. 만드는 법이 묵과 거의 같고, 면의 점도가 약해 뚝뚝 끊어져서 젓가락 대신 숟가락으로 떠먹어야 한다고 한다. 옥수수로 면을 만들어 짜장면을 먹는 것 또한 영화적 장치라고 하자.

한 가지 확실한 건 김씨가 농사를 짓고 수확물로 짜장면을 해 먹을 때가 영화를 통틀어 가장 행복한 시기라는 점이다. 새똥을 만지며 '똥이다'를 외칠 때 김씨는 환희의 웃음을 지었다. 무기력하고 우울했던 김씨는 농사를 지으며 말이 많아졌고 그에게는 생기가 넘쳐흘렀다. 짜장면을 먹으며 울 때조차 그는 행복해 보였다. 농사와 짜장면은 그에게 희망을 가져다주었다.

김씨의 취미적 농사는 별다른 비용 없이 1회성으로 끝났다. 요즘은 예전과 달리 취미의 종류도 많아졌고, 취미에 들어가는 비용도 높아졌다. 국어사전에서는 '전문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라고 하지만 전문가 수준에 필적하는 취미인들도 많다. 그래야 진짜 취미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렇다면 취미만 남은 생활도 가능할까? 돈도 시간도 많은 사람이라면 가능하겠지만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거의 불가능이다.

영화 <소공녀(2017)>의 주인공은 그런 불가능한 삶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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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미소'는 30대 중반으로 가사도우미를 하며 하루 4만 5,000원을 번다.
그녀는 월세방(250,000)에 살면서,
매일 한잔의 위스키(12,000)를 마시며 담배 한 갑(2,500)을 피운다.
지병이 있어서 머리가 하얗게 세는데,
머리 색깔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매일 약을 챙겨 먹어야 한다.
<주인공은 선을 넘는다> 249쪽


어느 날 담배값이 2,000원 오르고, 집주인이 월세를 5만 원 올리게 되면서 미소의 삶에 위기가 닥친다. 영화를 보는 대부분의 관객이라면 위스키나 담배를 포기하겠지만 미소는 집을 포기한다. 집이 없어진 미소는 친구들 집을 전전하고, 예상하는 바와 같이 누구의 집에서도 정착하지 못한다. 의지했던 남자 친구도 일하러 멀리 떠나고, 온갖 짐을 짊어진 미소는 단골 바에 가지만 위스키는 2,000원이나 올랐다.

영화의 마지막에는 머리가 하얗게 센 미소가 담배를 피우며 한강 다리를 건너고, 유리창을 닦고, 단골 바에서 위스키를 마신 후 오천 원을 지불하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카메라는 한강 변에 덩그러니 자리한 주홍색 텐트를 비추며 이 것이 미소의 새로운 집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렇게 그녀는 일하고, 담배 피우고, 위스키를 마시며 꿋꿋이 살아간다. 당장은.

오후가 쓴 <주인공은 선을 넘는다>를 읽으며 이 영화를 알게 되었다. 이 영화를 다룬 챕터의 제목은 '포기하지 않는 용기'이다. 처음에는 미소의 선택도, 그런 그녀를 따뜻이 보는 오후의 관점도 공감할 수 없었다. 미소 친구의 대사인 '나는 네가 이해가 안 돼. 집세를 못 낼 정도면 나 같으면 술 담배를 먼저 끊겠다. 넌 염치가 없어.'가 내 생각이자 느낌이었다. 몸은 현재에 있지만 과거와 미래를 오가며 번뇌에 휩쓸려 있던 어느 평범한 날 갑자기 미소가 떠올랐다. 미소는 지금, 여기에 충실한 삶을 살고 있구나. 일하고, 마시고, 피고. 그녀는 현재를 산다. 이것이 바로 용기구나. 다른 사람들에게 위스키와 담배가 낭비라면, 미소에게는 취미이자 삶이다. 적어도 미소는 자기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 또한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다. 미소는 절대로 남 탓도, 불평도 하지 않는다. 미소는 자신의 즐거움을 포기하지 않는다.

취미생활이 대중화(?)되다 보니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사람도 많아졌다. 더 있어 보이는 취미를 찾거나, 취미생활을 시작하기도 전에 장비를 사느라 돈을 쓰는 사람들도 많다. 남들이 한다니까, 멋있어 보이니까 시작하긴 했는데 어느 순간 '아, 내가 왜 이걸 하고 있지..., ' '이거 할 시간에 딴 걸 해야 하는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원인은 두 가지다. 하나는 나에게 이 취미가 맞지 않아서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거나, 너무 좋아서 본업이나 일상에 지장을 줄 만큼 몰두할 때다. 첫 번째 이유라면 취미를 바꿔야 한다. 맞지도 않는 취미생활 때문에 내 시간과 노력을 허비할 필요가 없다.

취미생활에서 잘하고 못하고는 중요하지 않다. 기왕이면 잘해서 프로급 실력을 갖출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상관없다. 어디까지나 취미이니까 말이다. 취미는 그저 즐기기 위한 일이지 남에게 보여주려고 하는 일이 아니다. 체면 차려야 하는 취미생활은 너무 고통스럽지 않은가.

농사도 마찬가지다. 혹자는 남들 다 하는 농사라고 쉽게 말하지만 멀리 떨어진 밭에 가려면 귀찮고, 흙이 묻으면 빨래도 많아지고, 갖고 온 수확물 처리하기도 애매하고, 벌레와 싸움 벌이는 것도 지긋지긋하고, 날이 너무 가물거나 태풍이 오면 농작물 걱정에 안절부절 못 할 수도 있고 옆 밭의 베테랑 농부가 잔소리를 잔뜩 늘어놓을 수도 있다. 기껏 고생했는데 수확물이 시원찮을 때도 많다(본인은 고구마, 땅콩, 당근, 브로콜리, 청경채 등 실패를 많이 했다). 그럼에도 또다시 밭에 나갈 생각을 하거나, 다음에 뭘 심을까 고민을 한다면 이미 농사를 충분히 즐기고 있다는 증거다. 그렇지 않고 온갖 귀찮은 일이 더 많이 떠오른다면 취미로서의 농사를 포기하면 된다. 취미의 미덕은 시작도 끝도 쉽다는 것이다. 그리고 언제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농사를 해볼까 생각하는 이라면 일단 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다만 김씨처럼 비용이 거의 들지 않게 가볍게 시작하고, 일 년 정도는 이게 영 아니다 싶더라도 미소처럼 꿋꿋하게 해 보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희망까지는 아니더라도 즐거움 한 조각은 찾을 수 있을 거라 장담한다. 취미생활이 그대를 자유롭게 하리라.





주석 1. 농사로(www.nongsaro.go.kr), 농업기술길잡이35_옥수수(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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