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내기 때는 고양이 손이라도 빌린다
벼에도 꽃이 핀다. 허나 벼꽃을 본 도시민은 많지 않으리라. 요즘은 학교나 공공시설에 작게 논을 조성하거나, 큰 화분에 벼를 심어놓은 곳이 많아서 벼를 보기가 예전에 비해 그리 어렵지 않다. 만약 못 봤다면 몰라서 지나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벼꽃은 흔히 생각하는 '꽃'과는 좀 다르게 생긴 데다가 꽃이 작고, 짧은 기간 동안 피어있기 때문에 관심을 기울여야만 볼 수 있다.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7~8월에 주변을 잘 살펴보면 벼꽃을 발견할 수 있다. 두 눈을 부릅뜨고 주위를 살펴봐도 벼를 찾을 수 없다면 창덕궁으로 가자. 창덕궁 청의정 앞에 임금님이 모를 심던 작은 논이 있다. 2006년부터 모내기, 추수 행사를 하고 있으니 벼꽃도 볼 수 있을 것이다(코로나19 때문에 행사가 열리는지는 모르겠지만 벼는 심어놓았을 것이다. 아마도?).
밥심으로 사는 한국인이라지만 벼나 벼농사에 관심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멀리 가서 찾을 필요 없이 내가 그랬다. 올해 어쩔 수 없이 벼농사를 지어야 하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여전히 관심 없이 살지 않았을까 싶다. 어쨌든 이제는 관심이 조금 생겼다.
<벼꽃>은 2017년에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로, 일 년간의 벼농사를 영상에 담았다. 다큐멘터리 자체가 비주류 장르이기도 하지만 벼농사가 인기 있는 소재도 아니고, 영화 속에는 대사도, 이야기도, 내레이션도, 자막도 없어서 더욱 심심하고 불친절하게 다가온다. 영화는 유튜브에서 볼 수 있다. 러닝타임은 80분이다. 나 역시 한 번에 쭉 보지 못하고 여러 번 끊어서 봤음을 대놓고 고백하는 바이다.
영화 포스터가 원래 없는지 내가 못 찾는 건지 도저히 찾을 수 없어서 위의 사진을 대신 걸었다. 영화 <벼꽃>을 검색하면 두 개의 영화가 나온다. 남한에서 만든 <벼꽃>과 북한에서 만든 <벼꽃>이 나오는데 여기서 다루는 영화는 당연히 남한의 <벼꽃>이다(북한에서 만든 <벼꽃>역시 유튜브에 있어서 검색하면 늘 따라 나온다. 섬네일 때깔 자체가 촌스럽고, '조선영화'라는 문구가 떡하니 박혀있어서 절대로 헷갈리지 않는다.)
먼저 벼농사 과정을 설명해야겠다. 벼농사는 이렇게 이루어진다(주석 2).
1. 파종 : 볍씨를 소독하고 물에 3~4일 담가서 싹이 나면 묘판에 뿌린다. 볍씨는 파종을 하기 위해 따로 빼놓은 종자용 벼다.
2. 묘 키우기 : 싹이 나오는 것을 발아라고 한다. 발아해서 잎이 어느 정도 커질 때까지 키운다.
3. 논 정리 : 논의 잡초를 제거하고, 비료를 준 후, 갈고 편평하게 만든다.
4. 모내기(이앙) : 온실에서 잘 자란 어린 벼(묘)를 물을 채운 논에 옮겨 심는다.
5. 출수 : 벼에서 이삭이 나온다(출수). 이삭이 나오면 벼꽃이 피고 수분과 수정이 이루어진다.
6. 수확 : 전체 이삭의 90% 이삭이 황금색을 띠면 추수를 한다.
7. 건조 : 수확한 벼를 건조한다.
위에서는 빠졌는데 물떼기도 중요하다. 모내기 장면이 깊이 각인된 도시인들은 논에 늘 물이 차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벼농사를 할 때 2번 물을 뺀다. 이삭이 패기 전 40일~30일 사이에 물을 한번 싹 빼고, 이삭이 패고 30~35일 전후에도 물을 완전히 뺀다(주석 3). 소규모로 키울때는 물을 빼지 않고 키우는 경우가 많다. 벼농사를 하는 중간중간에 잡초 뽑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위에 설명한 대로 묘를 키워서 옮기는 방법도 있고, 아예 처음부터 볍씨를 뿌려서 키우는 직파재배법도 있다. 논이 아니라 밭에서 키우는 밭벼도 있다(밭벼는 종자 구하기가 어렵다).
<벼꽃>의 주인공은 벼와 경기도 파주에서 친환경 농사를 짓고 있는 이원경 농부이다. 이원경 농부가 심은 벼는 삼광이라는 품종이다. 영화를 보고 나니 벼의 품종이 궁금해졌다. 덩달아 통일벼 생각이 났다. 먹어본 적은 없지만 학창 시절 숱하게 들은 통일벼가 궁금해서 책도 사보고 검색도 해보았다. 칠순을 앞둔 아버지께 여쭤보니 단박에 '그 맛없는 쌀'이라는 답을 하셨다.
통일벼의 가장 흥미로운 점은 인디카형이라는 점이다. 벼(학명 Oryza sativa)는 크게 인도와 동남아시아에서 주로 먹는 인디카형과 중국, 한국, 일본에서 주로 먹는 자포니카형으로 나뉜다. 세계적으로 보면 자포니카형은 점유율이 10% 정도밖에 안 되는 비주류이다. 인디카형은 어른들이 안남미라고 말하는 쌀로 길쭉하고 얇고 찰기가 없어서 어떤 이들은 밥알이 날아다닌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자포니카형은 작고 통통하고 찰기가 흘러서 밥을 지으면 쫀득쫀득하다. 같은 벼인데도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이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에 중국을 통해 벼농사를 받아들인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자포니카형 벼를 재배해왔다. 1960년대에 재배하던 벼는 키가 커서 잘 쓰러지고, 도열병에 약하고, 비료를 조금만 많이 주어도 약하게 자라는 단점이 있었다. 통일벼는 냉해에 강한 일본의 품종 유카라(자포니카형)와 인디카형이면서 키가 작은 TN1를 교배한 잡종에 인디카형이면서 생산성이 높은 IR8을 교배한 품종이다. 즉, 세 품종을 섞어 만든 품종이라는 뜻이다. 자포니카형과 인디카형은 교배가 쉽지 않은데 이 어려운 일을 허문회 교수가 IRRI(국제미작연구소), 농촌진흥청과 협력하여 만들었다. 개발도 쉽지 않았는데 이걸 전국에 배포할 정도로 양을 늘리기 위해서 필리핀과 한국을 오가며 또다시 재배하고, 농민들을 설득하고(강압적 방법을 더 많이 쓰면서) 지도하며 재배하는 지난한 과정 끝에 통일벼는 유사 이래 최초로 쌀 자급자족을 이뤄냈다. 1978년 통일계 벼 품종 재배면적은 전체의 75.5%에 달했다. 기적처럼 나타난 통일계 벼는 1978년부터 3년간 이어진 흉작으로 외면받으면서 결국은 국내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아이러니하게도 통일계 벼는 해외, 특히 아프리카에서 맹활약 중이다(주석 4). K-농업이 우리 국민들이 잘 모르는 사이 국위선양을 하고 있는 셈이다.
2018년 국감자료에 의하면 현재 우리나라의 벼 품종은 300개가 넘는다(주석 5). 2000년대 초 농촌진흥청은 국제 쌀시장 개방화에 대비해 ‘최고품질 쌀 개발 프로젝트’에 착수했고, 2003년부터 지금까지 최고품질 쌀 18품종(삼광벼, 운광벼, 고품벼, 호품벼, 칠보벼, 하이아미, 진수미, 영호진미, 미품, 수광, 대보, 현품, 해품, 해담쌀, 청풍, 진광, 해들, 예찬)을 개발해 전국에 보급하고 있다(주석 6). 농진청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고시히카리나 추청(아끼바레) 같은 일본산 쌀이 최고라는 고정관념이 있었다. 여러 종류의 쌀을 직접 먹어보고 그 특성을 기억하기보다는 이미 검증된 1~2 품종만 기억하는 것이 소비자 입장에서는 더 편하기도 하다. 국내 품종이 일본 품종에 밀려 지지부진하던 상황은 2019년 한일 무역분쟁으로 촉발된 일본 제품 불매운동으로 확 바뀌었다. 전 영역에 걸쳐 일본산을 한국산으로 대체하는 주장이 힘을 얻었는데 농업도 예외는 아니었다. 농진청에서도 외래 벼 품종은 줄이고 최고품질 벼 보급에 힘쓰겠다고 밝힌 것이다(그 전에도 꾸준히 노력을 해왔으나 성과가 미미했을 뿐이다). 대표적인 외래 벼 품종은 위에서 언급한 고시히카리와 추청이다. 2019년 기준 우리나라 전체 벼 재배 면적 중 외래 품종 재배 면적은 약 9%(65,974ha)이다. 1970년 한국에 도입된 '추청’은 정부 보급종에서 단계적 축소하고, 2002년부터 재배하기 시작한 ‘고시히카리’는 2021년부터 기본식물에서 제외된다고 하니 사실상 퇴출된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물론 소비자들의 선택은 아직 알 수 없다). 2019년 현재 최고품질 벼 품종은 전체 벼 재배면적의 24.8%(181.013ha)를 차지하며 매년 증가 추세라고 한다(주석 7).
잘 몰라서 그렇지 벼뿐만 아니라 우리가 즐겨 먹는 채소와 과일 중 많은 종류가 외국, 특히 일본 품종이거나 종자다(주석 8). 벼는 한국인의 주곡, 식량자급의 마지노선이라는 인식이 강하기에 관심도 받고, 예산도 받고, 해마다 개발하는 국내 품종으로 대체가 가능하지만 그 외의 작물은 철저히 무관심의 영역에 머물러있다. 무관심의 그늘 아래 국부는 해외, 특히 일본으로 줄줄 새어 나가고 있는 것이다. 글로벌 시대에 외국 품종이나 종자를 먹으면 안 된다는 논리는 너무 편협하다. 그랬다가는 먹을 수 있는 작물의 종류나 수가 대폭 줄어들어 새로운 보릿고개를 맞이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울의 추가 한쪽에 너무 치우쳐있고, 이 때문에 우리 농업이 외부의 힘에 휘둘리게 된다면 당연히 바꿔야 한다.
농업에 관심을 가지자는 주장은 오래되었다. 농민들이 국회의사당 앞에서 시위하는 모습도 해마다 되풀이된다. 바뀐건 없고 대중의 피로도만 높아지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 언론에서는 다뤄주지 않고, 사람들은 관심이 없다. 이 복잡한 시대에 농업까지 관심을 두기에는 너무 피곤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나 몰라라 외면하기에는 우리 생활과 너무 밀접하다. 어느 누구도 먹지 않고서는 살 수 없다. 2020년 장마로 채소값이 폭등했을 때를 생각해보자.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 그 여파는 2021년 봄인 지금까지도 미치고 있다. 배추농사가 조금이라도 안되면 배추값이 올라 김장을 하니 마니 호들값을 떠는 분위기를 생각해보자. 주부나 자취생이 아니라면 덜 와 닿을 수도 있겠지만 농업은 사는 곳과 상관없이 우리 삶 아주 가까이에 있다.
농업에 관심을 가지는 가장 쉬는 방법은 농사짓기다. 작물을 키우다 보면 농사에 얼마나 많은 노동력이 들어가는지 알 수 있다. 이 글의 부제인 '모내기때는 고양이 손이라도 빌린다'는 속담은 벼농사 뿐만 아니라 농사 전반에 해당되는 표현이다. 많은 도시 농부들이 수확철이 되면 탄식을 한다. 마트에서 사는게 정말 속편하고 싸다는 걸 깨닫게 되는 것이다. 잠깐 삼천포로 빠지자면 이 속담은 아마도 일본 속담인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다'에서 변형되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국립국어원에 문의글도 있다(주석 9). 개인적으로는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고양이보다는 개 친화적인 문화라고 생각한다(온갖 언어표현 및 예술작품에 등장하는 단골 동물은 단연코 개/강아지이다). 품종 뿐만 아니라 농사 속담에도 일본의 영향력이 남아있다는게 좀 아이러니 하기는 하다.
나는 <벼꽃>을 보면서 주인공은 벼가 아니라 노동이라는 생각을 했다. 인간이 소비하는 식물은 재배 식물이다. 인간의 손에 길들여졌기에 모습이나 성질이 야생에서 자라던 때와 완전히 달라진다. 벼를 예로 들면 야생벼와 달리 종자가 잘 떨어지지 않고, 휴면성이 약해지고, 꽃가루의 수가 적고, 종자의 크기가 커지는 등의 변화가 일어났다. 야생성을 잃으면서 식물은 더 허약해졌다. 소량의 품종을 대량으로 재배하다 보니 병해충이 퍼지면 전부 피해를 입는 일도 종종 나타나게 되었다. 병해충을 막고, 영양분을 주고, 물을 주고, 홍수를 막아주고 등등 식물을 키우기 위해 인간은 계속 시간과 노동력을 투입한다. 요즘은 기계와 농약이 노동력을 절약해 주지만 작은 규모의 밭이나 친환경 재배에서는 여전히 사람이 대부분의 일을 해야 한다. 윌리엄 블레이크는 '순수의 전조'라는 시에서 '한알의 모래에서 세계를 보고 / 한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라고 했다. 벼를 보고 있자니 '한알의 쌀알에서 땀을, 한송이 벼꽃에서도 노동을' 보게 된다.
농업이라는 큰 카테고리 안에는 많은 분야가 있다. 언론 속 농업은 화학비료나 농약 등의 안전성 여부나 경제논리로만 다뤄지기 일쑤다. 품종의 종류나 역사도 중요하게 여긴다면 조상들과 이 땅의 역사, 종의 다양성과 균형 나아가 생태계까지 관심을 확장할 수 있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쉽지 않다는 것을 요즘 직접 경험하고 있다. 학교에서 텃밭 이론 수업을 하다 보면 아이들은 몸을 비비 꼰 채 딴짓을 하고 있고, 나 혼자 떠들고 있을 때가 많다. 강의 실력 부족이기도 하겠지만 흙이니 비료나 품종이니 하는 주제가 그리 흥미로운 주제가 아닌 것도 일조하리라. 그래도 학교나 도시 안에 텃밭이 늘어나고, 농사가 우리 삶 가까이에 들어온 건 참 좋은 현상이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고, 눈에서 가까워지면 마음도 가까워지니 말이다. 확실히 아이들은 강의실에서 이론 수업 듣기보다는 작물 심는 수업을 더 좋아한다. 그리고 열심히 한다. 어차피 외우고 시험치는 수업도 아니니 다른건 다 까먹어도 직접 만졌던 흙의 감촉과 다양한 씨앗의 모양, 각기 다른 모습으로 자라는 작물을 어렴풋이나마 기억했으면 좋겠다. 올 여름엔 꼭 벼꽃도 보여줘야겠다.
주석 1. 영화의 전당 https://www.dureraum.org/bcc/board/view.do?rbsIdx=118&page=7&idx=155
주석 2. 벼의 재배 과정 https://www.cng.go.kr/tour/upo/00002410.web
농사로-텃밭가꾸기-식량작물 재배 매뉴얼-벼 http://nongsaro.go.kr/portal/ps/psz/psza/contentMain.ps?menuId=PS00389&tabMenuNo=PS04117&cntntsNo=205306&totalSearchYn=Y
주석 3. 벼농사 물관리 요령 http://nongsaro.go.kr/portal/ps/psv/psvr/psvre/curationDtl.ps?menuId=PS03352&srchCurationNo=1038
주석 4. 머니투데이 https://news.mt.co.kr/mtview.php?no=2020042017483158605
주석 5. 이투데이 https://www.etoday.co.kr/news/view/1672821
주석 6. KDI경제제정보센터 https://eiec.kdi.re.kr/publish/naraView.do?fcode=00002000040000100021&cidx=12379
주석 8. 한국영농신문 http://www.youngnong.co.kr/news/articleView.html?idxno=28346
주석 9. 국립국어원 https://www.korean.go.kr/front/onlineQna/onlineQnaView.do?mn_id=216&qna_seq=33208
참고 자료
1. 농사로 http://www.nongsaro.go.kr
2. 농업과학도서관 http://lib.rda.go.kr/main.do
농사 용어는 한자가 많아서 무슨 뜻인지 알기가 어렵다. 농업과학도서관 사이트 내 '알기쉬운 농업용어집'에서 쉬운 단어로 풀이해준다. 적극 이용하자.(농업과학도서관 - 소장자료 검색 - 알기 쉬운 농업용어짐 http://lib.rda.go.kr/main.do)
3. 농서남북 http://lib.rda.go.kr/pod/main.do
4. 국립식량과학원 https://www.nics.go.kr/index.do
벼 품종에 대해 더 알고싶은 사람은 국립식량과학원에서 발간한 '주요 식량자원(벼) 품종해설서'를 보면 된다.(국립식량과학원 - 연구성과-발간자료-주요 식물자원(벼) 품종해설서 http://www.nics.go.kr/bbs/list.do?m=100000135&bbsId=libPublish&bbsSn=0&searchCtgryNo=&pageIndex=1&focus=search&searchType=bbsSj&searchValue=%EB%B2%BC)
5. 실록 통일벼, 이완주 지음, 도서출판 들녘 귀농총서55, 201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