넝쿨째 굴러온 호박, 아니 사랑
아주 아주 오래전에 TV에서 호박을 키우는 영화를 봤다. 할아버지와 손녀가 주인공이고, 둘이서 아주 큰 호박을 키우는데 자세한 건 기억이 나지 않지만 호박에 주사를 놓는 장면만큼은 뚜렷하게 기억이 난다. 이 영화를 찾아보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영어권 나라에서 제작한 그저 그런 텔레비전용 영화가 아니었나 싶다. 대신 <그로잉 더 빅 원 Growing the big one(2010)>를 알게 되었다.
<Growing the big one>, 한국어 제목이 없어서 임의로 촌스럽게 번역하자면 ‘큰 거 키우기’라는 뜻이다. 2010년 미국에서 방영한 텔레비전용 영화여서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미국에서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영화는 유튜브에서 무료로 볼 수 있고 한글 자막은 없다). big one은 중의적 의미로 호박이자 사랑이다. 로맨스 영화답게 호박보다는 남녀 주인공의 사랑에 초점을 맞추지만 어쨌든 영화 속에 농사가 나오니 낙점!
줄거리부터 훑어보자. 주인공 엠마는 라디오 진행자로 그녀가 프로그램을 맡은 후 청취율도 올라가고 있고 본인도 자신의 일을 사랑한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은 엠마는 급히 워싱턴의 밸리빌(Valleyville)로 간다. 장례를 치르면서 해가 바뀌기 전에 할아버지가 남긴 빚을 갚지 않으면 농장이 넘어간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엠마. 엠마가 밸리빌에 있는 동안 엠마의 프로그램은 더 젊고 예쁜 여자 진행자에게 넘어가버리고, 상사는 그녀에게 호박 재배 프로그램을 하라고 지시한다. 얼떨결에 새 프로그램을 시작했지만 농사를 전혀 모르는 엠마는 첫 방송부터 실수를 해서 웃음거리가 된다. 할아버지는 엠마에게 호박 씨앗을 남겼는데 동네 주민인 세스가 자꾸 찾아와 씨앗을 팔라고 조르고 있었다. 세스의 제안을 거절하던 엠마는 호박 대회에서 일등을 하면 25,000달러 상금을 받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자동차 수리점을 열고 싶은 세스와 농장을 지키고 싶은 엠마는 상금을 나누기로 하고 함께 호박을 키우기 시작한다. 할아버지가 남긴 재배 노트를 보며 호박을 키우는데 주민들의 도움도 받고, 세스와 동고동락 하는 사이 서서히 호박도 커지고 사랑도 싹트게 된다. 게다가 엠마의 호박 키우기 프로그램도 점점 인기를 얻게 된다. 대회에 가장 큰 호박을 출품해 일등을 한 그들은 상금을 받게 되고(세스는 자신의 몫을 엠마에게 양보한다) 엠마는 메이저 방송사에 스카우트된다. 갈등하던 엠마는 회사의 제안을 뿌리치고 세스와 약혼을 한다. (끝)
주인공과 동네 주민들은 엄청나게 큰 호박을 재배한다. 밸리빌은 한적한 마을로 보이긴 하나 농촌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등장인물 중 전업 농부는 없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남자 주인공 세스는 무려 스탠퍼드 대학에서 엔지니어링을 전공한 인물로 온갖 기계를 고치는 일을 하고 있고, 변호사 바비는 비료 파는 일을 겸업하고, 그 외 인물들은 항시 동네 커피숍에 모여서 수다를 떨고 있어 직업을 알 수 없다. 어쩌다 거대 호박 키우기가 마을의 중요 취미가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남자 주민들은 거대 호박을 키우는데 정신이 팔려있고(시장도 거대 호박에 올인하고 있다), 여자 주민들은 호박 때문에 과부 아닌 과부가 되었다며 하소연을 한다. 어쨌든 호박으로 대동 단결한 밸리빌인데 호박 그 자체보다는 상금 때문에 호박을 키우는 게 아닌가 하는 합리적 의심이 들기도 한다. 1,000원으로 계산해도 25,000달러는 2천500만 원이니 욕심이 날만하다.
쟁쟁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대회에서 1등 한 엠마와 세스의 호박은 1,800파운드, 약 852kg이다. 엄청 무겁고 조금만 실수하면 호박이 터지기 때문에 기중기 같은 기계를 이용해서 살살 들어 올려야 한다. 키우다가 터지거나, 무게를 재다가 터지는 불상사가 일어나면 그해 농사는 꽝이다. 인터넷에 거대 호박, 자이언트 호박, 슈퍼 호박 등을 검색해보자. 듣지도 보지도 못한 호박 사진이 줄줄이 나온다. 외국에서는 재배하는 사람들도 많고 대회도 많이 열리는(상금도 빵빵한) 인기 있는 농사이다.
세계에서 가장 무거운 호박은 2016년 벨기에 사람이 키운 호박으로 무려 1,190.5kg이다. 1톤이 넘는다(주석 1). 우리나라에서는 2020년 의령에 사는 양재명, 백철숙씨 부부가 키운 465kg 호박이 최고 (비공식) 기록이다(유퀴즈온더블록 69화에 양재명 씨가 출연해서 호박 농사에 대해 이야기한다). 농촌진흥청에서는 2003년부터 ‘박과채소 챔피언 선발대회’를 개최하는데 2020년은 코로나 때문인지 장마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열리지 않았다. 일본에서는 500kg대 호박이 최고 기록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도 언젠가는 그 기록을 깨지 않을까.
호박만 크게 자라는 건 아니다. 거대 채소를 검색하면 각종 대회에 출품된 거대한 당근, 비트, 배추, 양배추. 양파 등을 볼 수 있는데(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의 크기를 자랑한다) 어떤 것도 호박을 이길 수는 없다. 1톤 가까이 자라는 채소는 현재 호박밖에 없다(이 말이 틀렸다면 꼭 알려주시길!).
호박은 박과 채소이다. 박과에는 600여 종이 있는데 수박, 참외, 멜론, 오이, 동아, 수세미, 여주 등이 다 박과이다. 우리나라에서 식용으로 재배하는 박과 채소는 대부분 1년생이고 덩굴성이며(폐포계는 비덩굴성) 자웅동주, 그러니까 암꽃과 수꽃이 한 식물에 같이 핀다. 한 개의 꽃 안에 암술과 수술이 같이 있으면 양성화이고, 암술만 있는 암꽃과 수술만 있는 수꽃이 따로 피면 단성화이다. 단성화도 두 종류로 나뉘는데 암꽃과 수꽃이 한 개체에 같이 달리면 자웅동주(암수한그루), 따로 달려서 암그루 수그루 구분이 되면 자웅이주(암수딴그루)이다. 채소는 대부분 양성화이나 박과채소는 단성화이다. 호박은 암꽃이 수정이 되면 꽃이 시들고 꽃 뒤가 부풀어 오른다. 그 부분이 호박이 된다. 분명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 같은데 사람들은 꽃이 열매가 된다는 사실을 잘 모른다. 꽃은 수정을 위한 생식 기관이고, 꽃 아래 씨방에서 씨앗이 자라니(아닌 경우도 있다) 꽃이 있던 자리에 열매나 씨앗이 달린다. 나 역시 이런 사실을 뒤늦게 알았으나 젠체하며 말하고 다닌다.
생물은 세계적으로 공통된 학술적 이름, 그러니까 학명으로 표기한다. 학창 시절 생물시간에 달달달 외웠던 지식을 소환해보자. 계문강목과속종. 그중에서 속과 종의 이름을 나란히 붙인 것이 학명이다. 호박의 속명(속의 이름)은 Cucurbita으로 Cucumis(오이)+orbis(원형)에서 유래한 단어로 동근 오이라는 뜻이다. 호박을 보고 오이를 연상하기가 쉽지 않지만 학명을 붙인 린네는 그렇게 봤나 보다. 호박과 오이는 둘 다 박과채소이니 그렇다고 하자. 호박 속에는 여러 종이 있다. 그중 주로 이용하는 종은 동양계 C.moschata, 서양계 C.maxima, 페포계 C.pepo 호박이다. 속명의 뜻을 보면 동양계인 moschata는 향기, 서양계인 maxima는 최대, 페포계인 pepo는 표주박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주석 2). 애호박과 조선호박, 맷돌호박이 동양계 호박이고, 밤호박(단호박)과 거대 호박은 서양계 호박, 주키니와 핼러윈 때 쓰는 잭 오 랜턴(jack-o'-lantern)은 페포계 호박이다. 다른 식용 채소들과 마찬가지로 품종이 무척 다양하다. 품종을 자세히 알지는 못하더라도 모종을 살 때는 애호박인지 밤호박인지 주키니 인지는 물어봐야 나중에 놀라지 않는다.
거대 호박은 '아틀란틱 자이언트 Atlantic Giant' '월리스 와퍼스Wallace Whoppers' '페이톤 트윈스 자이언트 Paton Twins Giant’ 등의 품종이 있는데(주석 3) 모두 허버드 스쿼시라는 품종에서 개량된 것이라고 한다(주석 4). 양재명 씨는 방송에서 해외에서 직접 씨앗을 구입한다고(직구) 말했다.
호박은 열매뿐만 아니라 씨앗은 볶아먹고, 잎은 쌈 싸 먹고, 꽃은 튀김으로 먹는 1타 4피 채소이다. 찾아보니 줄기를 먹는 사람들이 있어 1타 5피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타협해서 1타 4.5피라고 하자.
호박과 호박꽃은 못생김의 대명사로 쓰인다(이에 대해 호박은 아직까지 입장표명을 하지 않고 있다). 특히 꽃은 샛노랗고, 크고, 말린 꽃잎이 불가사리처럼 보여 징그럽기도 하고 이리 봐도 저리 봐도 예쁜 구석이 없다. 이 멋없는 꽃은 특유의 밋밋한 색깔과 크기로 눈에 잘 띈다. 슬슬 날이 더워지면 여기저기서 호박꽃이 나타난다. 텃밭도 아닌 공터에서, 담장에서, 지붕에서, 뜬금없이 자라는 커다란 잎과 노란 꽃을 보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 수수함과 익숙함이 잊고 있었던 자연과 그 안의 나를 환기시키기에 편안함으로 다가오나 보다. 2014년 안나푸르나 서킷 트레킹을 할 때였다. 길을 가다가 어느 집 지붕에 자리를 잡은 늙은 호박을 봤다. 춥고 외롭던 길에 만난 호박이 무척 반가웠다. 내 고향에서 보던 채소를 머나먼 이국의 땅에서 만났을 때, 네팔이 한층 가깝게 느껴졌다. 네팔에서 호박음식을 먹어봤다면 더 좋았을 텐데 그게 좀 아쉽다(달밧과 볶음면만 주야장천 먹었다. 달밧에도 호박이 들어가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덩굴성 채소를 키워보지 않았다. 뻗어나가는 덩굴 관리가 귀찮을 것 같고, 자리도 많이 차지할 것 같아 덩굴성 채소를 안 키우다가 2020년에 학교 텃밭에 강낭콩을 재배했다. 그것도 비덩굴성 강낭콩을 재배했다. 결과만 말하자면 망했다. 수확시기를 맞추지 못했다. 나의 첫 번째 덩굴성 채소는 무엇이 될까나. 아마도 오이와 수세미와 호박이 될 것 같다. 올해 학교 텃밭에 심을 예정이니 말이다.
호박은 키우기 쉽다고 들었지만 초보자에게는 순지르기가 골치 아프지 않을까 한다. 욕심 같아서는 아이가 좋아하는 수박과 된장국과 각종 볶음요리에 자주 들어가는 애호박에 도전하고 싶지만 '초보'라는 주제 파악을 해야지. 특히나 수박은 재배난이도가 '상'이다. 올해 심기로 한 오이, 수세미, 호박 공부를 열심히 해서 남부럽지 않게 잘 키워봐야겠다. 요즘 같이 자료가 넘쳐나는 세상에서는 독학하기가 편해서 그나마 다행이다.
내가 옛날에 봤다던 영화에서는 호박에 주사를 놓는 장면이 있었다. 무슨 주사였는지 모르겠다. 일종의 영양제가 아니었나 싶다. 거대 호박이니 영양분도 훨씬 많이 필요할 테니 말이다. 유퀴즈온더블록(69화)에 출연한 양재명 씨의 비닐하우스를 보면 거대 호박은 저마다 개인 선풍기와 개인 담요를 갖고 있다. 주인은 새벽에 와서 호박을 살펴보고 매일매일 최소 2시간을 호박에 할애한다. 양재명씨는 호박이 가족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반려 호박. 비록 몇 달 밖에 살지 못하지만 호박에 쏟는 애정의 깊이는 가족만큼 진하리라.
아직까지 내겐 애착 가는 작물이 없다. 농사를 얼마 안 지어봤으니 당연하겠지만 언젠가는 생기지 않을까. 그날을 기다려본다. 전도연과 설경구가 나오는 <내게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영화가 있다. 나는 아내 말고 밭이 있었으면 좋겠다.
주석 1. https://www.giantpumpkin.com/world_records.php
주석 2. 출처: 원예작물학 1-채소,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부, 2016
주석 3. https://schoolgardening.rhs.org.uk/Resources/Info-Sheet/Grow-a-giant-pumpkin
주석 4. 중앙일보 기사 https://news.joins.com/article/16950274
BBC 기사 http://www.bbc.com/earth/story/20150114-the-biggest-fruit-in-the-world
참고자료
1. 호박 등 작물에 대한 자료는 농서남북 사이트에서 무료로 원문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