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와 영화
나는 도시농부이자 초보 농부이다. 도시에서 살며, 도시에서 농사를 짓기 때문에 도시 농부이고, 농사 경험이 적기 때문에 초보 농부이다. 2015년부터 옥상에서 화분을 이용해 농사를 지었다. 농사라고 하기에는 좀 거창하지만 도시농업에서는 상자텃밭과 옥상텃밭을 가꾸는 것도 어엿한 농사에 들어간다. 출산과 육아로 농사를 쉰 기간이 있어 제대로 농사를 지은 건 2~3년밖에 되지 않는다. 이 정도면 누가 봐도 초보가 확실하리라.
코로나 19로 답답하고 암울한 2020년에 농사 복이 터졌다. 구청에서 운영하는 도시농부 과정에 등록했더니 3평 개인 밭과 공동 밭을 일굴 기회가 생겼고, 초등학교 텃밭강사로 일하게 되었다.(참고로 본인은 도시농업 관리사 자격증이 있고, 방통대 농학과에 재학 중이다. 그래도 초보는 초보다.) 일 년 농사를 마무리하는 겨울에 접어들면서 당분간 농사를 짓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먼저 확실히 밝혀야겠다. 농사는 무척 즐거웠다. 땡볕에 쪼그리고 앉아 몇 시간씩 잡초를 뽑는 것도, 무거운 호스를 끌어가며 물을 주는 것도 즐거웠다. 자그마한 싹이 흙 위로 불쑥 올라와 쑥쑥 자라는 모습은 언제 봐도 질리지 않는 기쁨이었다. 작물을 키우다 보니 돌을 금으로 만드는 연금술사보다 내가 더 위대한 힘을 가졌다는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다행히 지금은 착각에서 벗어났다).
그렇다면 무엇이 힘들었나. 기회비용이 예상보다 컸고, 내가 땅주인이 아니다 보니 할 수 있는 일이 제한적이었다.
첫 번째, 기회비용. 무슨 일(생산이나 소비 기타 등등)을 하게 되면 그 일을 하기 위해 다른 일은 포기해야 한다. 포기해야 하는 다른 일을 경제적으로 측정한 것을 기회비용이라 한다. 구청에서 배정해준 밭은 우리 집에서 자전거로 왕복 1시간이 걸렸다. 본인은 차가 없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더라도 도보로 가야 하는 길이 너무 길어서 자전거가 유일한 이동수단이 되었다. 왕복 1시간이면 그리 먼 거리도 아니지만 길이 위험했다. 자전거 전용 도로가 없는 길이다 보니 차도와 좁은 인도를 오가며 아슬아슬 자전거를 타야 했고, 밭과 논이 모여 있는 곳에 접어들면 토사가 쌓여서 비포장도로가 되다시피 한 흙길을 십여분 가야 했다. 자칫하다가는 교통사고가 크게 나거나 논두렁 옆 도랑에 처박힐 수 있었다. 실제로 굳어버린 토사 때문에 자전거가 넘어질 뻔한 적도(그랬다가는 더러운 도랑으로 입수했을 터) 여러 번 있었다. 비 오는 날이나 비 온 다음날은 아예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자전거도 옷도 진흙이 튀어서 엉망진창이 되기 때문이다. 5살 딸아이는 왜 엄마 자전거는 이렇게 더럽냐고 물었다. 4만 원 주고 중고로 산 낡은 자전거는 흙 세례를 받아서 더 꾀죄죄해졌다. 가끔 닦고 물로 씻어내도 지저분 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래도 상반기에는 아이를 태우고 밭에 다니기도 했고 일주일에 한 번은 꼭 갔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힘들어졌다. 아니 게을러졌다고 해야 하나. 긴 장마가 반가웠다. 아! 밭에 안 가도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하반기에는 염치 불고하고 같이 도시농부 수업을 듣는 분의 차를 얻어 타서 밭에 다녔다. 밭에 다녀오면 반나절이 훅 사라져 버렸다. 아이가 어린이집에 있는 동안이 내가 일할 수 있는 시간인데 그 귀한 시간의 반이 날아가 버리는 것이다.
텃밭강사로 일하게 된 곳은 집에서 편도로 한 시간~한 시간 반 가량 걸렸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지옥철을 타고 9시까지 도착하려니 죽을 맛이었다. 준비물이 많은 날은 정말 힘들었다. 강사료는 수업을 한 시간만 치기 때문에 작물 관리하는 시간(물 주고 잡초 뽑고 등등)과 이동하는 시간과 수업 전후 준비하고 정리하는 시간을 다 계산하면 돈을 '번다'고 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다른 할 일이 잔뜩 쌓여있는 상태에서 농사에 시간을 투자하는 게 점점 부담스러워졌다. 좋아서 시작한 일이었는데 기회비용이 점점 커졌다. 밭일이 다른 일보다 더 중요한가 라는 질문이 자꾸 떠올랐다. 겨울이 되니 답이 확실해졌다. 농사는 지금 안 해도 되는 일이었다.
두 번째로 제한적인 농사. 친환경 농사에 관심이 있어서 이것저것 시도하고 싶은 건 많은데 할 수가 없었다. 내 땅이 아니기 때문이다. 심을 수 있는 작물도 제한적이다. 주말농장은 대부분 이랑이 좁다. 다른 밭에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 키가 크거나(햇빛을 가리니까), 땅심(영양분)을 너무 잡아먹거나, 옆으로 마구 뻗어나가는 덩굴성 작물은 되도록 심지 말아야 한다. 이건 당연한 일이다. 여럿이 농사를 지으니까. 개인이 운영하는 주말농장의 경우 매년 같은 땅을 경작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구청에서 분양하는 밭은 추첨제라 불가능이다. 땅이 달라지면 똑같이 농사를 지어도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 이런저런 시도도 해보고, 퇴비도 만들어 보고, 잡초로 유기물 멀칭도 해보고 싶었지만 내 땅 없이는 힘들다는 결론을 내렸다. 도시농업에 심취한 많은 사람들이 시골에 땅을 사서 귀농 또는 반귀농하는 걸 보고 도시농업의 끝은 땅 구입이구나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나도 내 밭이나 논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굴뚝같다.
그리하여 2021년부터는 농사를 짓지 않을 생각이었다. 베란다 텃밭도 해보니 공간이나 햇빛 등 제약이 많고 이사를 다녀야 해서 포기. 차가 생기거나 (반)귀농하면 모르겠지만 2021년에는 그럴 가능성이 0%. 나중에 여건이 좋아지면 다시 밭으로 돌아가겠지만 기약이 없다. 그동안에는 어떻게 미련을 달랠까 하다가 영화로 농사를 짓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대학교에서 영화를 전공해 영화가 친숙하기도 하고(졸업 이후 영화와 상관없는 일을 하며 살았지만), 의도인지 실수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기고하는 잡지의 담당자가 '영화 칼럼니스트'라는 타이틀을 붙여줘서 진짜 영화 칼럼니스트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에 떠오른 아이디어였다. 그래야 담당자도 나도 거짓말쟁이가 안될 테니 말이다.
자, 농업 영화를 보면서 농사 공부도 하고, 농부들에게 감정이입도 하며 사이버 농사를 지어보자. 자료조사를 해보니 농업 영화가 많지 않았다. 어렵사리 10개를 선정했다. 다큐멘터리가 아닌 상업용 극영화에서는 농촌이 배경이고 주인공이 농부라고 해도 농사 장면이 몇 장면 나오지도 않는다. 농사는 배경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제대로 나오지도 않는 몇 장면 가지고 농사법을 아는 건 무리다. 그래서 직접 농사를 지어본 작물은 농사법을 조금이라도 쓰고, 재배 경험이 없는 작물은 농사법 보다 작물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쓰기로 했다. '영화로 농사짓기'이니 영화보다 영화 속 작물에 초첨을 맞추려고 한다. 이제 부지런히 사이버 농사를 지어야겠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을 처음 썼던 건 2021년 초였다. 인생이란 예고 없이 흘러간다더니 그 말이 맞다. 중학교에서 일 년간 텃밭 수업을 하게 된 것이다. 학교 텃밭이지만 사실상 내가 다 가꿔야 하기에 개인 텃밭처럼 심혈을 기울여 농사를 지어야 한다. 결국 또 현업 도시농부가 되어서 사이버 농사까지 겸업하는 투잡 농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