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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친밀한 나혜씨 Nov 10. 2024

금요일 오후 4시의 블랙홀

응급 독거노인의  병원 동행기

“한 집에서는 살 수가 없어요”     


남편과 수도권에 사는 전 직장동료와 밥을 먹었다. 본인이 태어나고, 학교를 다니고, 직장이 있던 40여년의 삶이 우리 지역이다보니, 주된 강사일도 여기서 들어온다. 그래서 한 주에 3,4일은 남편과 떨어져 내려와 여기서 지낸다.

친정집에서 출퇴근을 하면 될 일인데 굳이 안 써도 될 비용을 들여가며 ‘나와서 산다’는 거다.   

   

“처음엔 집에서 출퇴근 했죠. 눈 앞에 뻔히 보이니까 스트레스가 되더라고요. 치매 초기로 왔다갔다 하는 엄마하고 늙은 아버지가 맨날 투닥거리는 것도 보기 싫고, 엄마가 청소며 반찬이며 제대로 하는 일이 없으니 눈에 보이는 족족 내가 다 해야하는 상황이더라고요. 집인데, 쉴 수가 없어요”     


중년이 되면서부터 나의 어디어디가 아프기 시작했는지 배틀 벌이듯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제는 돌봄을 제공해야 하는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가 그 비중을 높여가고 있다. 나날이 노쇠한 노인이 되어가는 엄마로 인해 나도 그 수다장면에서 침 튀기며 한 몫을 하는 중이다.


누구나 겪는 당연한 삶의 시기들이 내 이야기가 되는 순간이 오고야 만 것이다.


               





홀로 사시는 기초수급자 장만수 어르신(가명)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너무 어지러워서 입원 좀 해야겠다”며 병원동행을 부탁하셨다.    

 

담당자가 통화하는 내용을 듣고 나는 직감적으로 시계를 본다. 금요일 오후 4시. 

지금 이 시간에 병원 진료를? 특히나 입원을 희망하시는 곳은 1차병원이 아니다. 진료의뢰서가 있어야 가능한 곳이다. 가 봐야 아는 거겠지만, 상태가 심각하지 않으면 담당자는 어르신을 설득 해 가까운 신경과를 동행할 정도의 요량으로 어르신께 갈 채비를 한다.    


어르신은 2020년초부터 정기안부확인이 필요한 독거노인으로 등록되셨다. 어르신께 서비스를 진행한 지 2개월도 안 된 시점, 코로나의 첫 시발점이었던 우리 지역의 그 종교모임에서 슈퍼 코로나 31번 확진자가 발생했다. 그 어르신은 31번 확진자가 참여한 종교 회합 자리에 함께 계셨던 분이었다.   

서비스가 일제히 셧다운 되었을 때 였지만 우리는 전화로나마 이 어르신의 안부를 매일 확인했다. 그 때는 코로나가 폭발적으로 발생하던 초기였고, 매일 늘어나는 확진자의 숫자에 공포감이 팽배했다. 불과 한 달 만에 우리 지역은 누적 확진자 6천명에, ‘봉쇄령’ 까지도 거론될만큼 지역 전체가 코로나 바이러스 덩어리로 낙인찍혔다.     

아니나 다를까, 이 어르신은 며칠만에 발열과 기침 증상이 있기 시작했다. 보건소는 갑자기 폭증한 숫자를 감당하지 못해 접수를 받고도 몇일이 지나도 방문 검사의 여건이 안 되었다. 독거노인이 혼자서 보건소까지 이동할 방법도 만무했다. 가족도 없으셨지만 가족이 있다해도 감염의 우려로 동행해서 이동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검사결과가 나오는 것도 몇 일씩 걸리던 시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사만이라도 받게 해 달라고 독촉을 해 보아도 보건소는 마치 전쟁터 같았고, 전화 연결조차 쉽지 않았다.      

증상만으로도 어르신은 이미 확진자셨다. 치료가 갈급한 상황에 검사조차 받지 못한 상황이 지속되었다. 주말,휴일이 걸쳐진 날에도 우리 담당 사회복지사는 전화로나마 안부를 확인했고, 집 밖을 나오지 못하시는 어르신께 식료품 키트를 집 앞에 가져다 놓았다.

하루는 전화를 안 받으신 때가 있었다. 어느 누구도 전문 방호복을 갖춘 전문인력이 아니고는 집안을 열고 들어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다급한 마음으로 119에 상의를 했다. 119에서도 대안이 없었다. 코로나 확진이 나온다고 해도 우리 지역은 병상은 없고, 확진 의심자로 신고가 되어 아주 응급한 대상이면 가까운 타지 병원으로 이송 할 상황이라고 했다.      

다행히도 곧 어르신과의 전화가 연결되었고 어르신은 호흡 곤란 증세와 여러 가지 확진증세를 가지고도 우리의 관심과 관리로 잘 버티셨다. 드디어 일주일쯤이 지나 보건소에서 방문 검사를 시행했고 너무 당연한 의심할 여지없는 확진이었다.    
그래도 어르신은 우리의 열렬한 응원같은 연결로, 걸리면 마치 죽을지도 모르는 병과 같은 코로나를 잘 지나 일상을 회복하셨다.           


그 요청을 하신 분이 장만수 어르신이라는 말에 순간적으로 “입원 좀 해야겠다”는 말의 무게가 가볍게 들리지 않았다.  병원에 의존성을 보이던 분도 아니셨고, 스스로의 관리의지도 있는 분이었다. 본인의 증상은 누구보다 잘 아실 어르신이 입원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본인의 몸에 대한 직감이 있으셨을거다. 보호자도 없는 상황이니 늦더라도 도움을 드리는 게 맞았다.     

 

마침 어르신이 가고자 했던 병원에 다행히도 진료기록이 있어 상담이 용이했고, 진료를 해 본 뒤에 입원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는 확답을 받고 담당직원 2명이 어르신을 모시고 병원으로 이동했다. 마침 진료시간은 끝나 응급실을 이용할 수 밖에 없었다. 혹시나 입원이 안 되면 다시 모시고 집으로 데려다 드릴 요량으로 두 직원은 병원 응급실 안팎으로 보초를 서고 있었다.


그렇게 퇴근 시간이 지나고, 밤 9시가 다 되어서야 직원들에게서 연락이 왔다. 입원 전 코로나 검사를 하고 결과가 나올 때 까지는 다인실 입원이 안되므로, 검사 후 1인실로 입원시켜 드리고(1인실은 비급여라 기초수급자들 어르신들의 개별 비용부담이 관건이다. 마침 어르신 본인부담을 하겠다고 해 주셔서 그나마 결정이 빨랐다고 한다) 사무실에 가방을 가지러 복귀를 한다는 연락이었다. 금요일 오후 4시부터 이어진 5시간의 병원동행이 그제서야 끝이 났다.     


어떤 불편한 기색도 없이 기꺼이 자신의 시간을 더 내어 담담히 보호자의 역할을 해 준 직원들이 감사했다. 어르신의 바램대로 입원을 도와 드려서 주말휴일 동안 마음이 편할 것이라는  그 마음이 더 이뻤다.            






희한하게도 금요일 오후 4시가 넘어 걸려오는 전화는 자주 그랬다.      


또 한 번은 어르신 전화를 받고 담당 사회복지사가 현장에 갔는데 응급상황이었다. 119가 왔고, 어르신만 구급차에 실어 보냈어야 했는데 엉겹결에 우리 직원이 같이 타고 종합병원으로 가게 되었다.


그 때부터 빠져나오지 못하는 블랙홀에 빠졌다. 응급실 간호사에게 상황을 이야기 하고 빠져 나오려고 했지만 보내주지 않았다(아마도 그냥 무연고자 임을 이야기하고 나오면 되었을 것인데, 우리 직원이 차마 어르신을 그냥 두고 나오지 못했던 것 일 것이다).   

   

밤 11시가 되어서야 먼 곳에 사신다는 친척이 연락을 받고 응급실에 도착했다. 우리는 그 보호자가 오기만 하면 교대를 하고 빠질 생각이었다. 그러나 황당하게도 그 친척은 자신에게 연락이 닿아 어쩔 수 없이 오게 된 심경이 불편했는지 우리에게 역으로 화를 냈다. 그리고는 교대는 커녕 “다시는 이런 일로 연락하지 마라”며 어르신 얼굴도 제대로 안보고 가 버렸다.    

  

우리의 일은 과연 어디까지인가. 인정에 끌릴 일이 아니긴 했지만 매일 얼굴보는 어르신들의 사정을 알기에, 우리는 그냥 우리 마음 편하자는 말로 둘러대며 그렇게 일을 했던 적이 많았다.




노인의 혼삶(혼자의 삶)은 혼자서 자립적인 생활을 할 정도의 건강이 허락할 때는 그나마 자유롭다. 누군가의 돌봄이 필요한 시간이 늘어날수록 자유는 줄어들고 불안이 커진다. 그럴수록 가족, 이웃, 그리고 공식적인 기관의 서비스들과 잘 이어져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백으로 안전하지 않을 경우에는 24시간 돌봄이 필요한 곳의 ‘단체의 삶’으로 진입할 수 밖에 없다, 내가 살던 집과 마을에서의 ‘개별적 삶’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일상생활이 유지될 수 있을 때 라야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독거 어르신들을 가족이 있는 분들과, 그렇지 않은 분들로 나누었다. 가족이 있는 노인이라 하더라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분들은 따로 체크했다.

가족이 가까이 있거나, 먼 곳에 있어도 관계가 좋은 노인들은 보호자인 가족들의 연락처를 잘 확보 해 두었다. 우리가 가까이에서 어르신의 응급상황을 먼저 확인하게 될 때 급히 연락을 전해 드리는 것만으로 우리의 역할은 끝나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스럽고 쉬운 과정이다.


그와 반대로, 가족들이 전혀 없는 무연고 어르신이면 우리가 잠시 보호자가 되기도, 빨리 도움을 줄 수 있는 다른 지원기관을 찾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노인복지서비스가 잘 되어 있지만 분절적이기도 해서 막상 이용 하려고 할 때 그렇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대상의 여부, 자격의 여부, 서비스 제공시간과 인력의 한계 등으로 이용할 수 없을 수도 있고, 연결이 되어도 또 공백이 발생할 수도 있었다. 그러면 우리는 어르신을 주 담당하는 기관으로서 ‘나 몰라라’ 할 수 없어 직무의 범위를 벗어난 도의적인 보호자의 역할들 기꺼이 수행하기도 했다.


지금은 내가 독거노인들을 지원하던 현장에서 다른 기관으로 발령을 받은지 2년이나 지났다. 아마도 지금은 내가 재직할 때 와는 달리 현명하게 직무범위에 맞는 전문성으로 잘 대처하고 있으리라 여겨진다.      





나는 '금요일 오후 4시의 블랙홀'로 부터는 빠져 나왔지만, 이제는 매주 토일 저녁 7시쯤 친정모친에게 전화를 한다. 주중에는 우리집에서 애들 봐준다고 와 있으니 내 눈으로 상태를 확인하지만, 혹시나 친정집에 혼자 가 있는 엄마에게 있을지도 모르는 응급상황을 체크하는 것이다.


작년에 저혈당쇼크로 119를 하루에 두 번이나 불렀던 그 날의 트라우마로 엄마의 안전을 확인하는 다정하지 않은 딸의 형식적인 안부전화다.

“지금 뭐 하냐, 밥은 먹었냐, 산책은 했냐..” 재미없는 질문들로 잠시 안부를 확인하다가 할 말이 없어 잠시 침묵. 그리고 다시 "월요일에 보자"며 전화를 끊기 일쑤다.


그래도 ‘그 별일 없음을 확인'한다.

이제는 수백명의 지역 어르신이 아닌, 우리 집 안 노인  한 분에 대한 밀착돌봄을 시행하는 찐경험 중이다.



* 대문사진 출처 :  unsplash의 elena-mozhvilo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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