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친밀한 나혜씨 Nov 03. 2024

잘 물든 단풍은 봄꽃보다 아름답다

독거 어르신들의 가을나들이


'가을은 모든 잎이 꽃이 되는,
두번째 봄이다'
- 알베르 까뮈-


쨍하고도 알록달록한, 요란하고도 울긋불긋한 제철 만난 나뭇잎들의 몸 단장 시즌. 그 초대에 적극적으로 응하고 싶은 가을이다.


"언제 가노?"

"올해는 어데 가노?"

"내 빼 묵고 가면 안된데이"


가을에는 나들이, 겨울에는 김장이 독거 어르신들에게 가장 인기가 있고 챙김받는 서비스다. 누락되는 순간 전화 통에 불이 날 수 있다. 단디 챙겨야 한다.     


이번에는 또 어디로 가나, 담당 사회복지사는 가을이 오기 전부터 고민을 시작한다. 다녀오지 않은 곳, 유행 좀 타서 핫 한 곳, 체험 할 게 있는 곳, 편도 2시간은 넘지 않는 곳을 찾아야 한다. 여행사 직원도 아니면서 70~90대까지 어르신이 즐길 수 있는 여행을 짠다. 

(그 때는 그랬다. 지금은 다 짜여진 여행사 프로그램 중에 골라서 이용하기도 한다지만).  

   

갈만한 곳이 정해지면 담당 직원들의 꼼꼼한 답사도 필수다.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을 단체로 모시고 왔을 때 무리없이 소화 할 당일 코스인지 조목조목 체크해야 한다.

식사시간대 어르신이 드실만한 메뉴가 있는 단체수용이 가능한 식당이 있는지, 차에서 내려서 많이 걷지는 않는지, 코스마다 화장실은 가까운지, 우천시 관광 대신 대체할 실내 프로그램이 있는지 등등..

사회복지사는 수퍼맨, 수퍼우먼이라 불리기도 했다.                





여행 당일날 아침, 소집시간은 아침 8시. 그러나 우리는 안다. 분명 7시부터 와 계신 어르신이 있으리라는 것을. ‘우리는 분명 7시에는 없을 것’이라는 암묵적인 공지로 ”절대 너무 일찍 오시지 마세요“고 했지만 제대로 지켜진 적이 없다.

새벽잠이 없는 어른들이니. 소풍날 어린이들도 유난히 그 날만큼은 일찍 일어나지 않던가. 어르신들도 아이처럼 설레는 날이니 그러려니 한다.     


45인승 대형버스가 도로변을 차지하고 서 있으면 멀리서도 집결지인 표가 난다. 평소와 달리 잘 차려입으신 어르신, 립스틱 곱게 바르고 선글라스로 멋을 낸 어르신, 거동이 불편해서 실버카를 저만치서부터 밀고 오시는 어르신들까지. 대형버스의 짐칸은 기관에서 준비한 준비물 외에 실버카 몇 대가 같이 동행하여 실린다.      


담당 복지사는 환한 얼굴로 하이톤의 인사를 건네며 오시는 어르신들께 명찰을 건넨다. 어르신들끼리도 서로간에 아는 사람은 안부를 묻고 근황을 챙기신다. 왁자한 모습이 벌써 정겹다. 집 밖을 나와 연결되는 접촉의 반짝임이 여기저기 번쩍번쩍 한다.      


공식적인 출발과 함께 버스 안에서는 몇가지 리츄얼이 진행된다.

먼저 담당자의 오늘 나들이에 대한 안내가 있다. 꼭 끼워달라던 어르신은 오늘 가는 장소를 그제서야 아신다. 뭐, 가는 곳이 그리 중요하지는 않은 법이니.  


이어 소장의 인사가 이어진다.

“어르신들하고 나들이 온다고 딱 좋은 날 받아놨지요. 날씨 너무 좋지예? ...

그리고 첫째도 안전, 둘째도 안전이예요!

오늘 우리의 안전을 책임져 줄 기사님께도 박수!”

박수와 함께 눈이 마주치는 90이 넘는 어르신의 두 눈 속에는 고마운 마음이 그렁그렁 담겨있다.

”누가 이렇게 나이 많은 우리들을 데리고 가 주겠노?“ 진심의 말이 건네온다.


바로 이어 간식을 배분한다. 따끈한 온도가 잘 느껴지는 백설기 한 조각과 간식봉지를 건넨다. 어르신들을 생각하며 이것저것 구색갖춘 과자, 사탕, 귤에 물까지 한 봉지가 두둑하다.


설레이는 마음도 목적지를 향해 출발한다. 이동하는 차 안에서 바깥 풍경들이 빠르게 눈을 스쳐간다. 어르신들에게는 혼자서는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할 내 집과 내 동네를 벗어나는 즐거운 이탈의 시작이다.           





예전~ 라떼라떼한 시절엔, 가는 길과 오는 길 버스 안은 ‘관광버스 춤’이 정석이었다. 지금은 큰일 날 일이지만 버스 복도에 모두 나와서서 버스가 들썩들썩 할만큼 춤을 춰 댔다.

간만에 맞이하는 어르신들의 나들이흥을 맞추기 위해 직원들이 더 텐션을 높였다. 어르신들과 마주보고 서서 어설픈 춤이나마 흥겨운 박자에 맞추어 최선을 다하곤 했다. 그런 수고가 자동으로 ‘컷’ 된 셈이니 어쩌면 고마워 할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여전히 노래는 계속된다. 차 안에서 노래방 기계를 틀거나, 관광지에 어느 곳에선가 돗자리를 깔고 준비해간 무선 마이크를 돌린다.


과연 어르신들의 단골 곡은?       


“(중략)
뜬 구름 쫓아가다 돌아봤더니
어느 새 흘러 간 청춘
고장 난 벽시계는 멈추었는데
저 세월은 고장도 없네"

- 고장난 벽시계 (나훈아)    

나훈아 못지않은 너훈아, 노훈아 쯤 되시는 어르신들의 노래가 흘러 나온다. 심취한 표정, 눈을 감은 주름진 얼굴에서 어르신들의 살아온 인생과 회한이 잠시 묻어난다. 고장난 벽시계처럼 세월도 멈추면 좋으련만, 고장도 안 나는 세월이 너무한다 싶다.     


여자 어르신들의 단골 선곡은? 이 노래가 빠진 적은 없는 듯 하다.   

   

”참을 수가 없도록 / 이 가슴이 아파도 /
여자이기 때문에 / 말 한마디 못하고 /
헤아릴 수 없는 설움 혼자 지닌 채 /
고달픈 인생길을 허덕이면서 /
아아 참아야 한다기에 / 눈물로 보냅니다 /
여자의 일생”

- 여자의 일생 (이미자)

노래를 들으면 여성 어르신들의 각자의 삶이, 모두 한묶음이 되는것 같았다. 요즘이야 너무 평등한 좋은 세상이 되었지만, 여자이기 때문에 켜켜이 쌓였을 설움을 노래로나마 전해 듣는다.


그러고 보면 가을날은 어쩌면 핑계였다. 눈앞에 좋은 색색이 좋은 단풍이나 바다, 놀라울만한 구경꺼리들도 어찌 보면 ‘콧바람 쐬는 딱 좋은 핑계’였다.  


작은 물통에 생수인 냥 소주를 따라서 와서 점심 반주로 몰래 기분좋게 드신 어르신의 너스레! 알지만 한쪽 눈 질끈 감고 모르는 척 한다.

잠시 걷는 것도 숨이 찬 어르신의 걸음을 부축하여 속도를 맞추어 걷는다.

이렇게 나들이를 또 따라 올 수 있으려나 기약없음을 내다보는 어르신께 다음 해도 꼭 모시겠다고 단단한 약속을 한다.  



              



‘봄에 피는 꽃, 새싹만 예쁠까요?
가을에 잘 물든 단풍도
무척 곱고 예쁩니다.  
봄꽃이 예뻐도 떨어지면
아무도 주워 가지 않지만,
가을에 잘 물든 단풍은
책 속에 고이 꽂아서 오래 보관도 합니다.

우리의 인생도 나고 자라고
나이 들어가는데,
잘 물든 단풍처럼 늙어가면
나이 듦이 결코 서글프지 않습니다’

- 법륜스님 '인생수업' 중 -




인생을 사계절로 표현한다면 어르신들은 어느 시기쯤 와 계신걸까? 봄꽃이 아니라고 아쉬워 한 적도 많으시겠지, 이미 가을의 시기를 지나 스산한 겨울을 먼저 마음에 들여 버린 날이기도 하시겠지 싶다.


그러나 잘 물든 단풍처럼 나이 듦이 그저 서글프지만은 않으시기를. 혼자서 보내는 그 어느날, 가끔 기억에서 꺼내보면 힘이 되기도 하는 가을추억하나 새긴 날이었기를 바란다. 평소 가지 못하는 먼 지역 어딘가의 햇빛과 바람과 단풍이 추억갈피가 되어 끼워진 날이기를 말이다.      



<2018년 10월의 가을나들이> '그때 그 어르신들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계실까?'






* 대문사진 출처 : 언스플래시의 autumn-mott-rodeheaver의 사진

이전 06화 “너 참 사랑했었다”는 치매어르신의 고백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