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침식사를 한 후 함께 방을 썼던 교인분께 인사를 드렸다. 그분은 내가 여행을 잘 마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신다 하셨고, 나도 감사인사를 드리며 길을 나섰다.
눈 내린 46번 국도는 수시로 제설차들이 오가며 길가의 눈을 치우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나를 지나려던 자동차 한 대가 갑자기 경적을 울리며 창문을 내렸다.
"어디까지 가세요?"
"아, 예! 양구까지 가고 있습니다."
"타세요"
젊은 부부 한쌍이었다.
남편 분은 우리나라 분이셨고, 아내 분은 동남아 쪽 분이셨는데 아이 두 명이 아주 귀엽고 예뻤다.
아이들은 갑자기 낯선 사람이 타자 불안했는지 긴장하는 빛이 역력하였다. 나는 얼른 웃으며 인사를 하였지만 아쉽게 내게 아이들과 친해지는 재주는 없었던 것 같다.
잠시 대화를 나눠보니 두 분은 명절을 맞아 고향인 양구로 올라가던 중이었고, 눈 내리는 국도에 사람 한 명이 계속 걷고 있어 경적을 울려봤다고 한다.
가끔 언론이나 인터넷을 통해 군인장병의 식사를 대신 계산하거나, 끼니를 거르는 형편이 어려운학생들에게 조건 없는호의를 베푸는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보였고, 나도 기회가 된다면 그리해 보리라 다짐하지만 참 쉽지 않은 것을 두 분은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계셨기에 느끼는 바가 있었다.
차를 얻어 탄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은 데다, 아이들과 나름대로 놀아주고 두 분과 대화를 하다 보니 어느새 양구에 도착했다.
나는 새해인사와 감사인사를 드리고 다시 혼자 섰다.
눈이 너무 많이 내리고 있었다.
양구를 지나 인제로 넘어가는 용하리에 이르렀다.
아직은 이른 시간이었기에 양구읍내로 들어가기보다 동쪽으로 방향을 잡아 좀 더 걸었고 용하리라는 마을에 이르렀다.
마침 면사무소가 보이기에 들어가 관광 지도를 받아 펼쳐보니, 용하리를 지나면 광치령을 넘어야 했고, 그 광치령을 넘어야 인제군 원통리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가는 길에 이렇다 할 마을이 없어 자칫 무리하게 이동하다가는 길에서 해가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것 같았다.
하여 무리하게 이동하는 것보다 이곳 용하리에서 하루 쉴 곳을 찾는 것이 바람직해 보였다.
눈이 그쳤다 내렸다를 반복하고 있었고, 설 명절 당일이었기에 괜히 무리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라 판단하여 나는 서둘러 쉴 곳을 찾았다.
그러나 나는 용하리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장님을 찾아보고자 했으나 명절날 외출을 하셨는지 부재중이셨고, 길에서 만나 인사를 나눈 어르신들께 조언을 구하고 도움을 청해봤으나 역시 쉽지 않았다.
그 외 식당을 비롯한 어지간한 가게들도 대부분 문을 닫았고, 내가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은 서둘러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가 양구 읍내로 가서 쉴 곳을 찾는 것뿐이었다.
송청교차로에서 양구 읍내로 들어가는 다리, 송청교를 지나고 있다.
한참을 걸었던 길을 다시 돌아온다는 것은 심리적으로 정말 힘들었다.
더구나 양구읍내로 다시 돌아온다 해도, 식사와 잠잘 곳을 해결할 수 있을지 확실치도 않은 상황은 내 발걸음을 더 무겁게 했다.
그러나 결과가 어떠하더라도 내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서둘러 양구읍내로 돌아오는 것뿐이었다.
설날 오후 눈 내린 양구읍내는 아주 조용했고, 거리에 인적도 차량도 드물었다.
동네를 한 바퀴 돌다 보니 근처에 사찰이 하나 있는 것을 알게 되어 무작정 그곳으로 향했다.
조심스럽게 사찰 안으로 들어가니 비구니 스님이 한 분 계셨다. 순간적으로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무슨 일이냐고 물으시는 스님 말씀에, 솔직히 말씀드리고 혹시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 조심스레 말씀드려 봤지만 역시 어려웠다.
괜히 미안해하시는 스님얼굴을 보니 너무 죄송스러워 서둘러 사찰을 빠져나왔다.
시간은 오후 3시를 넘기고 있었다.
읍내에는 문을 연 식당도 거의 보이지 않았고, 점점 배가 고팠다.
얼마나 걸었을까, 눈앞에 문을 연 해장국 집이 눈에 띄었다. 앞뒤 생각할 것 없이 식당 안으로 들어가 사정을 설명드렸는데, 사장님께서 감사하게도 설렁탕 한 그릇을 내어주셨다.
배가 제법 고픈 상황이었기에 허겁지겁 밥을 먹고 감사인사를 드리며, 설거지는 물론 식당 일이라도 도울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드렸으나 괜찮다고 말씀하셨다.
나를 그냥 보내시며 설 명절인데 여행 조심히 잘하라는 따뜻한 말씀을 해주신 그 인자한 모습에, 나중에 꼭 다시 찾아오리라며 길을 가다 돌아보고 다시 돌아보는 것을 반복했다.
배를 채운 후 어딘가 한적한 공터에서 다시 관광지도를 펴보니 마침 양구읍내에서 용하리로 가는 중간쯤 봉안사라는 절이 보였다.
만약 봉안사에서 나를 받아주지 않는다면 대안은 없었다.
봉안사 근처에는 이렇다 할 마을도 없었고, 다시 용하리로 가봐야 할 수 있는 것도 없었고, 그렇다고 양구읍내로 돌아오더라도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봉안사로 향했다.
설령 봉안사에서 하루를 쉴 수 없을지언정, 심신이 지친 이 상황에 법당에 들어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마음의 안정을 얻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