슥슥슥-
눈 내린 봉안사에 도착하니 처사님 한 분께서 눈을 쓸고 계셨다.
봉안사는 제법 규모가 컸고 대웅전 뒤편으로 관음전도 보였다. 절에 왔으면 부처님부터 뵙는 게 예의이기에 나는 처사님께 간단히 목례를 하고 곧장 대웅전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래도 불교에 관심이 있어 기본적인 예법은 알고 있었기에, 부처님께 목례를 한 뒤 삼배를 올렸다. 그리고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법당 안의 차가운 공기가 폐 속 깊은 곳까지 들어왔다 나가며 몸의 열기를 천천히 식혀주었다.
건물에서 뿜어져 나오는 특유의 나무 냄새와 은은한 향은 하루종일 긴장했던 나의 몸과 마음을 풀어주었다.
당장 쉴 곳도 찾지 못하여 어찌 보면 급박한 상황이었지만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 없었다.
"고민이 많은가 봐요?"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보살님 한 분께서 법당에 들어오셨다.
"아, 안녕하세요? 무전여행을 하고 있는 학생인데 지나가다가 법당이 보여서 들어와 봤습니다."
"명절인데 가족들하고 안 보내도 괜찮아요?"
"예, 가족들에게는 미리 연락을 해두었습니다. 여행을 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눈도 오고 갈 곳도 없을 텐데..."
"네 보살님...그렇잖아도 제가 화천에서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데, 사실 아직 쉴 곳을 찾지 못했습니다. 허락해 주신다면 하루만 묵었다 가고 싶은데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어렵다 해도 괜찮습니다. 법당에 자주 오지는 못해서, 기왕 온 거 잠시만 더 앉아있다 일어나겠습니다."
"그래요, 내가 답할 수는 없고 스님께 한 번 여쭈어볼게요."
보살님은 밖으로 나가셨고 다시 얼마간 시간이 흘렀다.
"스님께서 하루 지내도 좋다고 하셨으니 짐 챙겨서 따라와요."
이미 해는 지고 있었고 쉴 곳을 찾지 못해 하루종일 양구를 헤매고 다니던 상황.
만약 봉안사에서 하루 쉴 수 없었다면 상당히 난감했을텐데, 다행히 스님께서 허락해 주셨고 그런 나는 보살님 손에 이끌려 승방으로 향했다.
스님께서 인자한 미소로 나를 맞이해 주셨다.
절에는 나뿐만 아니라 처사님 두 분과 보살님 한 분이 계셨는데, 명절이라 어디 갈 곳이 없을 테니 하루 더 쉬었다 가라는 스님의 배려로 나는 이틀을 봉안사에서 머무를 수 있었다.
봉안사에 머무르는 동안 나는 나름대로 일과를 했다.
몸이 너무 고단한 나머지 스님을 따라 새벽 3시에 일어나 법당에 가지는 못했지만, 청소를 하고 눈을 쓸고, 절의 살림살이도 정리하며 일과를 했고, 틈틈이 법당에 들어가 떠오르는 여러 생각도 정리했다.
특히 처사님 한 분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는데, 인생에 있어 중요한 화두를 많이 던져 주셨기에, 여행을 마친 지 십수 년이 지난 지금도 그 화두를 곱씹고는 한다.
"너는 너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니?"
"글쎄요...완벽히 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제 스스로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마 그렇지 않을 거다. 사람들은 누구나 남을 이렇다 저렇다 평가하지만 정작 자기 자신은 모르는 경우가 많다. 나 자신도 모르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헤아릴 수 있겠니? 나중에 A4 용지에 너의 장점과 단점을 나열해 봐라. 아마 반의 반도 채우지 못할 거야.
이 절을 떠나게 되면 걸으면서 네 스스로에게 날것의 질문을 한 번 해보거라. 자신의 장점과 단점이 무엇인지, 무의식 중에 감춰진 내면의 이기적인 모습은 어떠한지, 그러나 한편으로는 선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대하는 모습도 어떠한지, 네 스스로에 대해 정확하게 알아보는 시간을 가지면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것이야."
이후 나는 정말 봉안사를 떠나 광치령을 넘어가며 내가 누구인지 진지하게 알아가는 시간을 가졌다. 처사님 말씀대로 처음에는 A4 용지의 반의 반도 채우지 못할 정도로 내 스스로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지만, 여행이 끝날 때까지 나의 성품, 이기적이고 욕심 많은 내면과 밝고 긍정적인 면까지 내 스스로에게 적나라한 질문을 던지며 알아갔다.
여행이 끝난 뒤에도 산행을 하거나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경우 나와의 대화를 종종 하였는데,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사회생활을 하며 언제부터인가 힘든 일이 있어도 내가 잘하는 것, 내가 좋아하는 것에 집중하며 긍정적으로 풀어낼 줄 알게 되었다.
또한 내게 부족한 부분은 보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되, 그 결과에까지 집착하며 결과를 반복하여 곱씹거나, 생각이 떠오르는 데로 끌려다녀 스스로를 힘들게 하지 않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나름대로 나만의 중심을 잡으며 삶을 살게 된 것 같다.
물론 세상은 늘 변하고 그 속에 속한 나 역시 휘둘릴 수밖에 없기에 평생 갈고닦아야 하는 부분이지만, 무전여행을 다녀오며 내 스스로에 대해 알아가는 계기를 가질 수 있던 건 내 인생 가장 큰 행운이었다.
"처사님, 저는 그동안 하루하루 주어진 일을 하기에 바빴어요. 학교를 다니고 시험을 치르고 과제를 하고 친구들을 만나며 시간을 보냈죠. 대학교를 졸업하면 보고 싶은 시험이 있어 몇 년 수험생활을 해야 하는데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사는 것 같아 뭔가 마음 한편이 허전합니다. 그래서 살면서 의미 있는 것을 해보고 싶어 무전여행을 떠나왔는데 제가 잘하는 건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지식과 지혜는 다르다. 우리나라에는 결코 지식이 부족하지 않다. 지식인들이 비양심적인 일을 저지르는 것은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는 것은 너도 잘 알 거야.
물론 지식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네가 여행을 통해 찾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네가 지식과 더불어 지혜도 찾았으면 좋겠다.
인생을 살다 보면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수많은 상황을 접한다. 그중에서도 본인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이 바로 사람과의 관계인데 지혜로운 사람은 본인이 누울 자리, 잠시 앉았다 일어나야 할 자리, 절대 가서는 안되는 자리를 정확하게 판단한다.
그러한 지혜를 어떻게 얻느냐? 그것은 나도 알 수 없다. 그렇지만 분명한 건 그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스스로를 계속해서 돌아보며 성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장사치는 돈을 만지지만 장사꾼은 사람을 만진다. '꾼'이라는 단어는 무언가에 통달한 사람을 뜻하는데 일자무식 농사꾼이 대학교수를 만나면 대화가 통할 것 같으냐, 그렇지 않을 것 같으냐? 두 사람의 대화는 무조건 통하게 되어있다.
어느 한 분야에 통달했다는 것은 사물의 흐름을 터득했다는 것이고, 그것은 모든 인간세상에 적용되는 말이다. 지혜란 그런 것이다."
"너는 스스로를 어른이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너는 아직 애다. 어른은 미성년자의 반대말도 아니고 그저 나이가 많은 사람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단순히 나이가 많은 사람은 노인일 뿐이야. 나는 네가 노인이 아니라 어른이 되길 바란다."
누구나 인생에 전환점이 있다.
그리고 내 인생의 전환점은 무전여행이었다.
단지 학교를 가고, 직업을 바꾸는 차원의 전환점이 아니라 삶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전환점.
무전여행을 통해 찾고 싶었던 그 무언가가, 이곳 봉안사에서 구체적인 화두가 되어 다가왔다.
그렇게 봉안사에서의 이틀이 순식간에 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