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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소 Sep 15. 2024

#05 사랑의 천국잔치

배후령 고개를 따라 춘천과 화천의 경계지점에 들어섰다. 앞으로 가야할 길이 아득하다.


나는 소양교를 지나 춘천 한복판을 통과하여 배후령을 넘었다. 어느덧 시간은 오후 3시를 넘기고 있었고, 겨울이기에 해는 앞으로 두어시간 안에 떨어질 상황이었다.


문득 무전여행 둘째날, 밤늦게까지 쉴 곳을 찾지 못해 사찰과 면사무소 숙직실을 전전하던 상황이 겹쳐지며 마음 한 편이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배후령을 오르며 깊은 생각에 잠겨 사색하던 여유는 이제 끝났다. 앞으로 가야할 길이 아득하기에 얼른 가까운 마을로 내려가 쉴 곳을 찾아보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러나 생각보다 내리막은 수월했다.


마음이 초조한 것도 있었지만, 내 걸음이 그렇게 느리지 않은데다 내리막에 속도가 붙다보니 한시간이 조금 더 걸렸을까? 생각했던 것 보다 빠르게 마을입구에 들어설 수 있었다.


화천군 간척리.


굵지는 않지만 가느다란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었고 '휘오오~' 소리내는 바람이 마음 한 켠을 스산하게 만드는 한겨울 농촌마을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민가가 드문드문 떨어져 있어 어디로 가야할지 잠시 고민했다. 일단 마을회관으로 가보았으나 문이 잠겨있었고, 명절 직전이어서 그런지 주위에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약간 당황하여 허겁지겁 돌아나오던 중 길을 가시던 어르신 한 분을 뵐 수 있었다.


"어르신, 안녕하세요? 무전여행을 하는 학생인데 춘천에서 걸어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오늘 이 마을에서 머물러야 할 것 같아 이장님을 한 번 뵙고 싶은데 혹시 이장님 댁이 어딘지 알 수 있을까요?"


"이장님댁? 저기 큰 길을 건너가서 바로 왼쪽에 보이는 집인데, 오늘 명절 전날이라 계실지 모르겠네. 얼른 가봐요"


나는 점점 초조해지는 마음을 다 잡으며 이장님 댁에 도착했다. 다행히 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져 초인종을 눌렀다.


"이장님, 안녕하세요? 저는 무전여행을 하는 학생입니다. 제가 여행중에 춘천에서 여기까지 걸어오게 되었는데 시간이 늦어 오늘은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정말 죄송하지만 혹시 이 마을에서 하루 정도 쉴 곳을 부탁드려도 괜찮을까요?"


"무전여행? 요즘에도 무전여행을 하는 학생이 있네요! 그런데 어떡하지? 우리집에서 쉬면 좋을텐데 내일이 설날이라 우리도 나가봐야 해요. 음...대신 여기 바로 뒤에 기도원이 있는데 학생이 괜찮다면 내가 원장님께 하루 쉴 수 있도록 부탁을 한 번 해볼게요."


"갑자기 이렇게 불쑥 찾아온것도 죄송한데, 괜히 저 때문에 기도원에 부탁까지 해주시고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그렇게 해주시면 너무 감사하겠습니다."


그렇게 나는 안도하며 기도원으로 향했다.


하루를 보냈던 참빛복음 선교기도원의 전경


나는 그때도 지금도 딱히 종교가 없다.


그렇지만 모든 종교는 한번씩 접해봤는데, 아주 어릴적엔 교회도 몇 번 나갔던 기억이 있고, 초등학교때는 성당에서 세례도 받았다. 그러나 또 좀 더 커서는 불교도 접하던 중이었는데 오늘은 이렇게 기도원이라는 곳을 오게 된 것이다.


내가 머문 곳은 참빛복음 선교기도원이었는데, 나중에 이곳에서 알게 된 교인께 여쭈어보니 교회는 교인들이 일상생활을 하며 예배를 드리는 곳이지만, 기도원은 교인들이 다른 것에 방해받지 않고 몇날 며칠을 온전히 기도에만 집중하고 싶을 때 오는 곳이라고 하였다.


나는 기도원에 도착해 이장님 소개로 오게 되었다며 말씀을 드렸고, 정확한 직책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관리자 한 분께서 나를 반갑게 맞이해주셨다.


관리자분께서는 내게 잠잘 방을 하나 배정해주셨는데 2인 1일이니 양해해달라고 하셨고, 잠시 후 예배가 있을테고 예배가 끝난 후 저녁식사가 있으니 그 때 식사를 하면 된다고 하시며, 종교가 다르다면 예배에는 참석하지 않아도 되니 편하게 쉬도록 배려해주셨다.


종교시설이 사회복지시설도 아니고 종교인들이 뜻을몰아 함께 만들고 운영하는 시설인데 외지에서 온, 그것도 교인도 아닌 나를 하루 쉬게해주는 것도 모자라 이러한 배려까지 해주시는게 너무 감사했다.


하여 '갑자기 신세를 지게 된 것도 죄송한데, 이렇게까지 배려해주셔서 감사드린다. 저는 2인 1실이 아니라 추위를 피할 공간만 주셔도 충분하며, 제가 비록 종교는 없지만 기도원에 온 이상 예배에도 참석하여 기도드리며 다른 분들과 똑같이 참여하겠다'며 감사인사를 드렸다.





"주여"


힘찬 외침을 시작으로 예배가 진행되었다. 모두 저마다의 사연과 간절함을 담은 기도였다.


예배가 시작되기전, 나는 자연스럽게 주변에 앉아계신 몇몇 분들과 서로 인사를 하고 얘기를 나누었다. 자녀의 진학문제, 부모님의 건강문제, 직장문제 등 저마다의 사연과 고민이 있었고, 나도 나름대로의 간절함이 있었다.


별다른 것 없이 보내온 20대의 중반, 그리고 앞으로 수험생활을 하며 보내게 될 20대의 후반.


나는 누구인지, 인생이 무엇인지, 삶의 목적은 무엇인지, 눈 앞에 놓여진 당장 쳐내야 할 시험과 과제와 수많은 인간관계에서 벗어나 오롯이 나에게 집중하며 그 답을 구하고 싶었다.


그렇게 기도하고 잘은 모르지만 더듬거리며 찬송가도 부르다보니, 예배는 어느덧 막바지에 이르렀다.


기분이 묘했다.


커다랗게 울려퍼지는 찬송가와 사람들이 기도하는 소리에 나도 함께 어우러져 의식을 이어갔다. 각자 내용은 다르지만 교인들이 한데 모여 같은 마음으로 간절했던 기도를 마치고 나니, 뭔가 없는 카타르시스가 느껴졌다.


비록 종교는 없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 자리에 계셨던 분들의 마음을 어렴풋이 느껴볼 수 있었고, 알 수 없는 유대감과 동질감도 느꼈다.


참빛복음 기도원에서 내가 느꼈던 감정은 지금까지도 그 여운이 남아있다.






예배를 마친 후 저녁식사를 했다.


저녁식사는 뷔페식이었는데 밥, 전, 갈비, 과일 등 여행 이후 이렇게나 다채롭게 먹은 것은 처음이었다. 이 시간이 지나면 다시는 이렇게 밥을 먹기 힘들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나는 허기진 배를 천천히 채웠다.


이후 양치를 하고, 세면을 하고 짐을 정리하고 배정받은 방으로 들어왔다.


나와 같은 방을 쓰셨는 분은 교회에서 직책이 있는 분이셨다. 권사님인지, 목사님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 분과 나는 같은 방에 나란히 누워 두런두런 얘기를 나눴다.


나는 평소 기독교에 대해 잘 몰랐는데, 세계사를 곁들인 기독교의 역사와 흐름, 기독교와 카톨릭의 차이 등을 알기 쉽게 알려주셔서 이야기가 마치 흥미로운 교양강의 같았고, 나의 개인적인 고민에 대해서는 인생 선배로서 이런저런 조언도 해주셨다.


대화를 나누다보니 어느새 밤이 깊었고, 우리는 잠을 청했다.


하루종일 눈 내린 거리를 걷고, 고개를 넘느라 몸과 마음이 많이 지쳐있었는데, 긴장이 풀리고 따뜻한 방에 누워있다보니 나도 모르는 새 스르륵 잠이 들었다.


기도원에서의 하루가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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