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가평군 상면 거리에는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저벅저벅...
누군가 다가오는 발소리에 저절로 눈이 떠졌다.
어느새 아침이 되었나 보다.
'이제 일어나야지..'
나는 눈을 비비며 밤사이 잠들어있던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아직 풀리지 않은 피로 때문일까?
나는 몸을 쉽게 일으키지 못하고 다시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저벅저벅...
발소리에 무겁고 탁한 소리가 겹쳐 들렸다.
아무래도 밤사이 눈이 내렸나 보다.
똑똑똑
"이제 시간이 다 됐습니다.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예, 일어났습니다. 바로 나가겠습니다."
어젯밤 미리 정리해 둔 짐을 챙겨 문을 열자, 한기가 느껴지는 차가운 바람이 내 옆을 스치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차가운 바람에 잠시 몸을 움츠렸다 앞을 보니, 나를 깨운 당직근무자 뒤편으로 소복이 눈 쌓인 풍경이 보였다.
"아, 눈이 많이 왔네요. 덕분에 밤사이 정말 잘 쉬었습니다. 짐은 다 정리했고 방 청소도 깨끗하게 하였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아닙니다, 잘 쉬셨다니 다행이에요. 눈이 많이 오니 아무쪼록 몸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나는 면사무소 숙직실을 나서며 무전여행 삼일째 아침을 맞이했다.
가평군 상면에서 청평검문소로 가는 길이 한적하다.
경기도 가평군 상면에서 맞이한 그날 아침은 온통 회색이었다.
길가의 건물 위로 눈이 소복이 쌓여갔고, 도로 위의 차들은 아주 느린 속도로 움직이며 내리는 눈을 맞으며 나아갔다.
낯선 곳에서의 낯선 아침.
가평에서의 흐린 하늘과 눈보라가 더해져 마음 한켠이 괜히 외로웠다.
그래도 얼마간 걸으며 숨을 깊게 들이키자, 폐 속 깊이 들어오는 찬 공기에 몸이 조금씩 깨어나는 것 같았고, 다시 얼마간 걸으니 조금씩 몸에서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오늘은 어디를 가야 할까..
목적지를 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일단 춘천까지는 가보고 싶었는데, 눈이 제법 오는 탓에 쉽지는 않을 것 같았다.
아무래도 이런 날은 무리하지 않는 게 좋겠지? 자칫 잘못하면 다시 어젯밤 같은 난감한 상황을 겪게 될 테니까.
문득 어제 만났던, 미안해하시던 스님의 얼굴이 떠올라 살짝 미소가 지어졌다. 정작 죄송한 건 나인데..
한적한 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길 옆으로 흐르는 하천과 눈 쌓인 풍경이 눈에 들어왔고, 여전히 차가운 공기도 코 끝을 간지럽히는 게 기분이 조금씩 좋아졌다.
무전여행이라는 낯선 상황에 조금씩 익숙해지며 마음에도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한걸음, 한걸음
아름다운 풍경과 사색을 즐겼고 시간은 어느덧 오후를 향해 가고 있었다.
다시 얼마나 걸었을까?
나는 현실로 돌아왔다.
어제는 운이 좋아 면사무소 숙직실에서 하룻밤을 지낼 수 있었지만, 이제 가장 큰 문제는 식사다.
처음 무전여행을 시작했을 때는 식당에 들어가 한 끼 식사를 청하는 게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어리기도 했고, 학생 신분이기 때문에 이럴 때 하는 거지 언제 해보겠냐는 생각으로 시작했던 무전여행이지만, 막상 식당에 들어가려니 용기가 나지 않아 도저히 발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그렇게 조금만 참자, 조금만 참자 하던 것이 어느새 하루를 꼬박 굶은 것이다.
오전 9시쯤이 되었을 때 길가에 있는 식당에 들어가 식사를 청해볼까 생각해 보았지만, '아니야 지금은 한창 아침장사를 하실 시간일 거야'라는 생각에 좀 더 걸었다.
오전 10시가 되었을 때 다시 한번 식당을 가볼까 생각했지만, '아니야, 지금은 재료준비를 하거나 정리가 한창일 거야'라는 생각에 다시 걸었다.
그렇게 다시 오전 11시가 넘어갔지만 여전히 나는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고 어느덧 배가 너무 고파 움직이기도 쉽지 않았다. 그만 주저앉아 쉬고 싶었지만 눈보라가 날리는 추운 날씨 탓에 그럴 수도 없었다.
이제 정말 한계에 다다랐을 때, 길가 옆에 위치한 작은 곰탕집이 눈에 들어왔다.
내게 더 이상의 선택지는 없었다.
무전여행 중 식당에서 첫 식사를 했던 가마솥 곰탕집. 아쉽지만 지금은 없어진 것 같다.
똑똑똑
"안녕하세요? 무전여행을 하는 학생입니다. 너무 죄송하지만 지나가는 길에 배가 너무 고파서 식사 좀 부탁하려고 들어왔습니다. 밥과 김치만 주셔도 감사히 먹겠습니다. 설거지도 다 하고 청소도 다 할 테니 식사 한 끼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사장님은 그런 나를 잠시 나를 빤히 쳐다보시고 말했다.
"아야, 여기 곰탕 한 그릇 내와라"
이틀 동안 제대로 된 식사 한번 하지 못한 상황에서 따뜻한 곰탕 한 그릇과 깍두기는 추위에 얼어붙은 몸을 녹여주었고, '추운데 어디까지 가니?', ' 반찬 좀 더 줄까?' 라며 나를 걱정해 주시는 사장님의 관심은 내 마음을 녹여주었다.
내가 원해서 시작한 여행이지만, 외로움, 추위, 배고픔은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이었고 그러한 현실 속에 받았던 사장님의 관심이 너무 감사했다.
당연히 밥값을 해야 했다.
나는 사장님께 설거지든, 청소든 뭐든지 시켜달라고 하였지만 괜찮으니 몸 조심하고 여행이나 잘하라고 하시며, 눈이 점점 심해지니 늦기 전에 쉴 곳이나 빨리 찾도록 한사코 나를 그냥 보내셨다.
무전여행을 하는 동안 몇 군데 식당을 들렀고 사장님들께서 식사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지만, 어떠한 사장님도 내가 설거지를 하거나 청소를 해서 밥값을 대신하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그 당시엔 깊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여행을 마치고 한참이 지나 생각을 해보니, 밥을 얻어먹는 내 입장에서야 당연히 죄송하고 감사한 마음에 뭐라도 도움을 드리고 싶지만, 사장님 입장에서는 처음부터 거절하면 거절했지 기왕 호의를 베푸는 일인데 설거지가 됐건 청소가 됐건 다른 방식으로 무언가를 받는다는 것은 마치 '밥값'을 받는 것 같아 모처럼 베푼 호의가 퇴색되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가 정말 식사를 얻어먹고 설거지나 청소를 했다면 그것은 사장님이 필요해서라기보다 죄송한 내 마음을 조금이나마 덜어주시고자 배려한 사장님의 깊은 생각 덕분이었으리라..
무전여행 중 하루를 쉬었던 가평군 청평면 하천1리 노인회관
어제의 낭패를 다시 반복할 수는 없었다.
오후 2시가 지나는 시점이었지만 더 늦기 전에 하루 쉴 곳을 찾으려던 중, 마침 청평검문소를 지나 46번 국도 우측에 있는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가평군 청평면 하천 1리
뒤편으로는 야트막하지만 산이 병풍처럼 펼쳐 있었고, 넓은 논과 밭에 쌓여있는 눈이 전형적인 시골마을의 겨울 풍경이었다.
목공소에서는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고, 그 뒤편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마을 굴뚝에선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다.
마을로 들어간 나는 길에서 만난 주민분께 마을 이장님 댁이 어디인지 여쭙고, 무작정 이장님 댁으로 향했다.
다행히 이장님은 댁에 계셨고, 나는 사정설명을 하며 혹시 마을에서 하루 쉬었다 갈 수 있는지,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 조심스럽게 여쭈었다.
이장님은 마침 명절 전이고 해서 마을회관이 비어있다며 그곳에서 하루를 쉴 수 있도록 흔쾌히 장소를 내어주셨다.
문득 지금까지의 모든 일들이 새삼스러웠다.
가족들과 친구들과 계획을 세우고 숙소를 예약하던 내가, 돈도 없이 여행을 다니며 식당에 가서 밥을 얻어먹고, 차를 얻어 타고, 쉴 곳을 찾고 있는 현실이 그러했고,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용기가 없어 밥도 먹지 못했던 내가 하루 쉴 곳까지 찾으며 점차 무전여행에 익숙해지는 모습도 그러했다.
불이 꺼져있고 아무도 없는 마을회관은 조용했다.
나는 천천히 짐을 풀고 간단하게 씻으며 잠시 쉬고 있는데, 갑자기 문 여는 소리가 들리며 아주머니 한 분이 들어오셨다.
인사를 드리고 상황을 설명하려 했는데, 이미 다 아신다는 듯 밥통에 밥이 있고, 냉장고에 반찬이 있으니 언제든 꺼내 먹으라고 하시며 불고기를 건네주셨다. 동네에서는 음식을 하면 이렇게 마을회관에 두고 사람들과 나눠먹으니 신경 쓰지 말라는 말씀과 함께 아주머니는 그렇게 회관을 나가셨다.
그러나 나는 알 수 있었다.
아주머니는 내가 저녁을 굶을까 봐 굳이 오셔서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알려주시고, 맛있는 음식을 챙겨주시기 위해 댁에서 음식을 해오신 것을...
그리고 내가 가질 부담감과 미안함을 덜어주시기 위해 원래 동네에서는 이렇게 음식을 나눠먹는다며, 당분간 사용할 일이 없는 마을회관에 음식을 두고 가신 것을 말이다.
나 혼자 살아가기에도 지치고 힘든 세상인데, 생전 처음 보는 남을 아무 조건 없이 배려하고 돕는 것도 모자라 부담을 덜어주는 아주머니의 배려를 나는 흉내조차 낼 수 있을까?
완전히 눈으로 뒤덮여 있던 길을 깨끗하게 치웠다.
마을 밖으로 나갔다.
여전히 눈이 내리고 그치는 상황이 반복되었고, 마을 곳곳이 눈으로 뒤덮여 있기에, 나는 마을회관 앞에 있던 제설도구를 이용해 눈을 치우기 시작했다.
여행을 시작한 이후 차를 얻어 타고, 식사를 얻어먹으며 부탁만 하던 내가, 드디어 무언가를 하는 순간이었다.
길이 깨끗해지자 아이들도 골목에 나와 공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냈고, 길을 지나가는 어르신들도 젊은 친구가 애쓴다며 한 마디씩 덕담을 해주셨다.
무언가 할 일이 있다는 것은 생각보다 기쁜 일이었고, 점점 깨끗해지는 길을 보는 내 마음도 뿌듯했다.
하천1리에서의 하루가 지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