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9시
모든 준비를 마쳤다.
남양주 천마산을 넘다 까진 뒤꿈치도 치료하며 푹 쉬었고, 짐도 다시한번 야무지게 정리하였다.
하루 묵었던 노인회관 구석구석을 청소기로 돌리고, 걸레로 닦고, 화장실 청소도 끝낸 후 이장님 댁으로 걸음을 옮겼다.
"잘 쉬었어요?"
다행히 이장님이 자리에 계셔 만나뵐 수 있었다.
"네 이장님, 덕분에 따뜻한 곳에서 정말 푹 쉬었습니다. 제가 따로 할 수 있는게 없어 노인회관은 깨끗이 청소하고 나왔습니다. 다시한번 너무 감사드립니다."
"아니에요, 곧 명절이고 날도 추운데 젊은 친구가 대단하네. 조심히 잘가요"
그렇게 4일차 무전여행이,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저벅저벅
나는 눈내린 46번 국도를 따라 계속 걸었다.
여행을 하며 한가지 알게 된 사실은 내 걸음속도가 조금 빠르게 걸으면 시속 6km 정도가 나온다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일상에서 걷는속도를 계산할 일이 있을까 싶었다.
여행을 하면서 하루에 20~30km 정도를 걸었다.
걸음을 계속하는동안 때로는 경치도 구경하고, 때로는 노래도 흥얼거렸지만 무엇보다 가장 많이 한 것은 사색이었다.
삶을 살아가며 쉴 틈도 없이 계속되는 외부의 자극이 한순간에 끊겨버리자, 나는 오롯이 내면에 집중할 수 있었고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대학교 3학년 겨울방학.
무전여행을 시작하기 전, 나는 졸업을 한 학년 앞두고 있었다. 방학이 끝나고 1년만 더 다니면 졸업이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 20대는 특별한게 없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나 대학교에 늦게 들어가게 되면서 다른사람들에 비해 수능준비를 더 했고, 늦게 시작한 대학생활을 하고 군대를 다녀오니 어느덧 27살이었다.
학교를 다니는 동안 이런저런 대외활동도 봉사활동도 했지만, 졸업을 앞둔 지금 모두 그만두었고, 졸업후에는 다른 시험 준비를 위해 2년 정도 수험생활을 계획하고 있었다.
나의 20대는 그렇게 흘러갈 예정이었다.
나름대로 하루하루 열심히 살았지만, 눈앞의 과제들을 쳐내고 하루하루 살아내기 바빴던 생활.
한 번 정도는 멈추고 잠시 쉬고 싶었다.
학생신분일때 할 수 있는 것을 해보고 싶었고, 생활에서 한 발 떨어져 삶을 바라보고 싶었고, 나름대로 인생의 목표도 세우고 싶었다.
그러던 차에 친구들 사이에 무전여행을 한 번 해보자는 얘기가 나오긴 했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탓에 흐지부지 되었다.
그렇게 어느덧 한달이란 시간이 흘렀고 설 명절이 앞으로 다가왔다.
2010년 2월 초.
날씨는 많이 추웠다. 방학도 명절도 얼마 남지 않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도 많은 사건사고가 있었고 세상은 흉흉했다. 아무리 남자라지만 혼자하는 여행은 위험이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몇날며칠을 고민했을까...결정적인 답은 의외로 쉽게 나왔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만 흐른다면, 무엇이 달라질까?'
그렇게 나는 홀로 여행을 떠났다.
46번국도를 따라 얼마간 걷다가 히치하이킹을 했다.
마침 춘천까지 들어가시는 아저씨 한 분이 차를 세워주셨고 나는 덕분에 춘천시내까지 편하게 갈 수 있었다. 아저씨도 어렸을때 했던 무전여행이 생각나신다며 다치지 말고 여행 잘 마치라고 응원해주셨다. 차를 오랫동안 탄 건 아니어서 대화가 길지는 않았지만 따뜻한 배려를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춘천시내를 통과하여 북쪽에 위치한 강원도 화천군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유포리를 지나 오봉산 배후령 고개를 넘어가야 했다. 지금이야 터널이 잘 뚫려 있어서 배후령 고개를 넘는게 어렵지는 않지만, 2010년 당시만 해도 터널이 없었기에 구불구불한 고갯길을 걸어 넘어가야 했다.
시간은 오전 11시를 지나고 있었다.
일단 식사를 해결해야 했는데 배후령 고개를 넘는 시간이 제법 걸릴 것 같았다. 밥 먹을 시간도 아까워 쭉 걷다가 배후령 고개 바로 아래쪽에 있는 막국수 집에 들어갔다.
사장님께 사정 설명을 드리고 비닐에 공기밥 한 덩이만 담아주실 수 없는지 조심스럽게 부탁을 드렸다. 다행히 사장님은 흔쾌히 공기밥을 건네주셨고, 나는 감사인사를 드린뒤 걸음을 옮겼다.
나는 여행을 하는 내내 차를 얻어타고, 식당에 들어가 밥을 얻어먹고, 마을에 들어가 잘 곳을 구했다.
그런 과정에서 내게 도움을 주셨던 모든 분들, 특히 몇몇 분들의 얼굴과 성함은 아직도 기억을 할 정도로 감사하지만 그당시 마음 한켠에는 '그래도 나는 학생이고 무전여행을 하고 있으니까...'라며 나를 정당화 하는 태도가 있었다.
무전여행 특성상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는 것은 당연할 수 밖에 없지만, 여행을 하면서 음료수 한잔을 들고 정자에 앉아 계시는 어르신들에게 다가가 말을 건낼 수도, 길거리에서 어묵을 먹는 아이들과 대화하며 계산을 할 수도 있었을텐데, 무전여행이라는 개념에 얽매여 받는것만 신경쓴 나머지 누군가와 나누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나 역시 다른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줄 수 있었다면 나의 무전여행을 더욱 다채로웠을텐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을 여행을 마칠때가 되어서야 깨달을 수 있었고, 그것이 여행의 한가지 아쉬움으로 남았다.
그런데 지나고보니 이러한 태도는 여행뿐만 아니라 사는데 있어서도 크게 다르지는 않은 것 같다. 내 스스로를 어떠한 틀에 가둬버리는 순간, 그 개념에 사로잡혀 다른 것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것 말이다.
'나는 비록 경력직으로 입사를 했지만, 아직 한달도 안되었으니 모르는게 당연해.', '나는 손재주가 좋지 못하니까, 그 일에서 빠지는게 당연해.', '퇴근하고 집에오면 너무 피곤하고 늦은 시간이니까, 운동할 시간이 없는건 당연해.'
직장생활을 하고, 친구들을 만나고, 하루하루 바쁘게 살다보면 해야하지만 하기가 쉽지 않은 것들이 생긴다. 그렇기에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내 행동을 정당화 하지만, 그러한 것들은 어디까지나 내 입장일 뿐, 다른사람들에게는 그저 핑계일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도 나는 그러한 상황이 생기면 스스로를 정당화 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무전여행에서 느꼈던 바를 바탕으로 스스로를 돌아보며 반성하는 하나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쌓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