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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소 Aug 18. 2024

#01 선택에 관하여

남양주 천마산 정상에서 보이는 가곡리가 아득하다.


휘호오...


'아..이러면 안되는데..'


산 꼭대기에서 내려다 보이는 마을에 하나 둘, 빛이 밝혀지고 있었다.


마루금에 걸려있던 해는 아주 느리게,

그러나 멈추지 않고 아래로 내려가고 있다.


2010년 2월 남양주 천마산 정상


무전여행을 시작한 첫날부터 문제가 생겼다.


한창 산 중턱을 오를 때만 해도 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고, 날씨가 제법 추웠기에 눈 정도는 올 수 있겠다 싶었는데, 생각지도 않은 진눈깨비가 온 산을 추적거리며 적시고 있었다.


진눈깨비는 나뭇잎에 부딪히며 타닥거리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살짝 쌓인 눈을 밟는 저벅거리는 내 발소리만 둔탁하게 퍼져나갔다.


'하아...'


예정대로라면 이미 동쪽에 위치한 가곡리 방향으로 하산하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 지금 내 앞엔 '등산로 폐쇄'라는 안내판이 길을 막고 있었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해가 떨어지는 것만 멍하니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는 서늘한 산속에 혼자 남았다.


살면서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얼마나 있겠냐마는 그래도 무전여행 첫날부터 산꼭대기에 갇혀버릴 줄이야..


이윽고 해는 배수구로 빨려 들어가는 물줄기마냥 마루금 너머로 사라져 버렸고 더는 나오지 못했다.






"빵빵"


얼마나 지났을까?

정적을 가르는 자동차의 경적소리가 저 멀리 마을에서 산 꼭대기까지 치고 올라왔다.


나는 황급히 정신이 돌아왔다.


위험하긴 하지만 '등산로 폐쇄' 안내판을 넘어 가곡리 방향으로 내려갈 것인가, 아예 예정에 없던 새로운 길을 가볼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올라왔던 길을 돌아서 다시 내려갈 것인가.


나는 원래 계획대로 행동하는 것을 좋아한다.


모든 일이 손에 잡혀 있어야 하고 중간에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원래 계획대로 가곡리 방향으로 내려가는 것에 무게를 두고 심각하게 고민했다.


'등산로 폐쇄' 안내판은 보아하니 산사태가 나거나 어딘가 무너지는 등 등산로 자체에 문제가 생겼다기보다 산림보호 차원에서 세워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길을 잘 모르는 데다 너무 어두워 자칫하면 조난될 우려도 있었고, 그렇다고 완전히 새로운 방향으로 가자니 그것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주변은 점점 더 어두워졌고, 시간은 점점 흘렀다.


이제 선택을 해야 했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작가인 장 폴 사르트르의 유명한 말처럼 우리는 항상 선택을 한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선택할 수 있는 기회는 단 한 번뿐이고, 한 번 선택하고 나면 다시는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선택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면 종종 뒤를 돌아본다.

때로는 후회까지 곁들이면서 말이다.


무전여행을 마치고 몇 년 후 내가 회사생활을 하며 대리직급을 달고 있을 때, 어느 날 회사동료와 술 한잔을 하다 '내가 이 회사 왜 들어왔나 몰라, 이럴 줄 알았으면 다른 회사에 들어갔을 텐데'이라는 식의 푸념을 했다.


직장인들이라면 누구나 하는 푸념이었고, 실제로 나는 당시 다니던 직장에 상당히 지쳐있었다.

그런데 내 푸념을 듣던 동료의 답변에 나는 정신이 멍해졌다.


"대리님, 너무 그렇게 생각하지 마요. 대리님이 우리 회사에 입사한 것은 분명히 여러 가지를 고민하고 또 고민한 끝에 내린 선택이었을 거예요.


지금은 대리님 마음이 힘들고 지쳐있기 때문에 후회하지만, 대리님이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분명 똑같은 결정을 내렸을 거예요. 왜냐하면 그 당시엔 그게 최선의 선택이었으니까요"


그랬다.


최종면접이 끝나고 회사로부터 합격통보를 받았을 때 내게는 분명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하나는 합격통보에 응하여 입사를 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입사를 거절하고 좀 더 신중하게 다른 회사를 찾아보는 것이었다.


당시 나는 이 회사가 그렇게 마음에 든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나쁘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만약 이 회사를 포기한다 하더라도 더 좋은 기회를 잡을 수 있을지 알 수도 없었기에 나름대로의 고민 끝에 입사를 선택한 것이었다.


이렇듯 우리 모두는 항상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을 한다.


물론 선택을 하기 위한 정보가 부족하여 직관적으로 선택을 해야 할 때도 있고, 이성보단 감정이 조금 앞선 상태일 때도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모든 상황이나 그 당시의 감정조차도 그저 우리에게 주어진 조건이며, 우리는 그러한 조건 속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할 뿐이다.


선택의 결과를 알고 있는 지금에 와서 뒤를 돌아보기 때문에 후회를 하는 것일 뿐, 그 당시로 돌아간다면 분명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그것이 우리에겐 최선이었으니까.






한참을 앉아있던 천마산 정상엔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올라왔던 길은 이미 칠흑같이 어두웠고, '등산로 폐쇄’라고 적힌 가곡리 방향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점점 땅거미가 지는 마을에 불빛은 강해졌고, 전조등을 켠 차량들은 그들의 보금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잠시 마을을 내려다보며 고민하던 나는 결국 올라왔던 길을 그대로 되돌아 내려가는 것을 선택했다.


그래도 조금이나마 익숙한 길로 내려가기만 하면 되었기에 마음이 편해졌고, 살짝 긴장했던 마음을 조금 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얼마나 걸었을까


한 번 올라왔던 길이었지만 이미 어두워진 산속을 내려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해가 떠있을 때 올라왔던 익숙한 길은 어느새 생전 처음 보는 길로 바뀌어있었다. 분명 계단과 로프가 있었던 길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공터로 변했고, 중간중간 보이던 벤치와 이정표도 보이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무언가 잘못됐음을 깨닫고 급하게 발걸음을 멈췄다.


어둠에 적응한 눈 덕분에 주변이 살짝 보이긴 했지만 구름이 많은 탓에 별빛조차 내려오지 않아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희미한 빛조차 없는 밤, 아무도 없는 산속, 보이지 않는 길


긴장이 극에 달해 심장이 쿵쾅대는 소리에 귀가 아플 정도였고, 호흡은 점점 가빠졌다. 작은 동물들이 움직이며 내는 갑작스런 소리까지 더해지며 공포감이 나를 덮쳐왔다.


아무리 심호흡을 하고 차분하게 마음을 먹으려 해도 쉽지 않았다.


'어떡하지..

언제까지 여기 있을 순 없는데 어디든 빨리 갈까?

아니야...잘못하면 더 큰일 날 수도 있는데 기다릴까? 그래...일단 기다려보자...'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어느 순간, 갑자기 하늘이 열렸다.


강하게 부는 바람에 구름이 완전히 걷히며 달과 별이 보이기 시작했고, 습기 가득 축축했던 공기는 거짓말처럼 따뜻한 봄바람이 되어 나를 감싸 안았다.


주변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익숙했던 계단과 벤치가 보이기 시작했고, 중간중간 읽으며 올라왔던 안내문도 보였다.


그렇게도 나를 긴장시키고 초조하게 했던 천마산은 불과 몇 분 사이에 전혀 다른 모습이 되어있었고, 나는 무사히 산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나는 무전여행 첫날부터 굉장히 중요한 선택을 수 차례나 했다.


정상에서 어느 방향으로 내려올지, 중간에 길을 잃었을 때 서둘러 더 내려갈지 가만히 있을지, 산에서 내려왔을 때 무전여행을 포기할지 계속할지..


그러한 순간의 선택이 모이고 모여 10박 11일의 무전여행을 만들었고, 인생의 셀 수 없는 많은 선택이 모이고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이제 나는 내 선택에 후회하지 않는다.


내가 한 선택이 시간이 지나고 되돌아보았을 때 결과적으로 최선이 아닐 수는 있다.


그러나 적어도 그 당시에는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었기 때문에, 약간의 반성이 있을 수는 있을지언정 후회하며 자책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저 다음번에는 좀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과거의 경험을 마음속에 새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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