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아침
나는 몸과 마음을 단정히 하고 건봉사 포교당에 들러 스님께 안부를 여쭙고, 감사 인사를 드리고, 작별 인사를 하였다.
그리고 간성읍내를 지나 대대삼거리로, 대대삼거리를 지나 해상리로 걸음을 옮겼다. 군생활을 하면서 수 없이 걸었던 길을 따라 걸음을 계속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날이 개어 저 멀리 마루금을 따라 GOP 라인도 아주 선명하게 보였다.
한참을 걸으며 강원도 고성의 풍경과 사색을 즐기다 보니 어느덧 오후 3시경이 되었다.
나는 해상리 마을회관 앞에 멈춰 섰다. 귀를 기울이니 마을회관에서는 왁자지껄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똑똑똑-
드르륵-
노크를 하고 문을 열자 열 분이 넘는 어르신들께서 앉아 말씀을 나누고 계셨다. 순간적으로 이목이 집중되었고 나도 모르게 침을 꼴딱 삼켰다.
"안녕하십니까? 무전여행을 하고 있는 학생입니다. 여행 중에 시간도 조금 늦고 힘도 들어 죄송하지만 괜찮으시다면 이곳 해상리에서 하루 쉬었다 가고 싶습니다. 부탁드려도 괜찮을까요?"
가장 가운데 앉아계시던 노인회장님은 나를 쓱 보시더니 이리 와 앉으라 하시며 소주를 한 잔 따라주셨다.
물질을 이루는 기본입자가 원자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쿼크였다는 사실
한옥을 지을 때 초석에 나무기둥을 짜 맞추기 위해 그랭이질을 해야 한다는 사실
호모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 간 분쟁에 관한 이야기
투자의 증감이 국민 총소득에 얼마나 영향을 주는지 알 수 있는 투자승수
이렇듯 평소 잘 알지 못하던 것, 알고 싶지 않은 것, 알아도 내 생각과 다른 것들이을 갑자기 아무런 맥락 없이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가 않다.
그러나 기승전결이 있는 이야기는 달랐다.
남북관계, 금강산 관광 등 평소 뉴스에서나 보던 문제는 나에게 다른 세상 이야기였다. 그냥 그런가 보다, 그런 일이 있었나 보다 정도였고, 깊게 생각한 적도 관심도 없었다.
그러나 강원도 고성은 지역 특성상 북한 바로 턱밑에 위치하고 있다 보니 노인회관에 계셨던 분들 중에서는 가족을 이북에 두고 온 분도 계셨고, 고향이 이북인 분도 계셨다.
대부분 어업이나 농업과 같은 1차 산업에 종사하시지만, 금강산 관광사업과 같은 남북교류 문제도 초미의 관심사였다.
정서적으로, 정치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남북관계가 중요한 지역이었고, 남북관계 흐름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에 따라 강원도 고성은 생활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는 곳이었다.
멀리서 글과 말로만 전해 듣던 사실들이, 나와는 관계없던 일들이, 어르신들이 직접 겪은 생생한 현실로 나에게 깊숙이 들어왔다.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나버려 세세한 대화내용까지 기억은 못하지만, 나의 관심 밖의 일들이 누군가에게는 절실한 것이었고, 뉴스를 통해 전해지던 단순한 사실의 나열보다, 어르신들이 직접 겪고 느낀 이야기들이 더욱 강렬하게 다가온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중에서도 특히 한 어르신과 오랫동안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어르신은 그 당시 젊은 세대가 부정적으로 지칭하는, 흔히 말하는 '노인세대'였다.
연세도 많으셔서 과거에 머물러 계셨고, 가부장적인 모습과 고집도 있으셨던 분이셨다.
그러나 그 어르신께서 전쟁을 겪으시며 온갖 고초를 겪어오신 일,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다하시다 다치셨던 일, 흉년과 풍년을 겪으며 농사를 지어가며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는 물론, 그 과정에서 어르신께서 느꼈을 수많은 감정과 생각을 듣고 나니 그 어르신은 물론, 우리가 흔히 말하는 '노인세대'의 정서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막걸리 좀 그만 드시라며 할머니께 끌려나가시는 귀여운 모습에, 세대갈등을 포함한 모든 인간관계에서 오는 갈등은 서로에 대한 이해에서부터 출발하면 풀릴 수 있는 실마리가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실마리는 이야기에서부터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무전여행이 아니었다면, 내가 강원도 고성에서 농사를 지으시는 어르신과 막걸리를 마시며 이렇듯 의미있는 이야기를 나눌 일이 있었을까 갑자기 새삼스러웠다.
다음날 아침
나는 마을회관 구석구석을 깨끗이 청소하고 마당에 눈도 쓸었다.
짐을 챙겨 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노인회장님께서 들어오셨다. 노인회장님은 내가 잘 쉬었는지, 불편한 것은 없었는지, 이제 어디로 가는지 걱정을 해주셨고 동시에 격려도 해주셨다.
지금의 모든 것이 감사했다.
무전여행을 떠난 초반만 해도 불안과 걱정이 가득했지만, 점점 시간이 흐르며 상황에 익숙해지고, 수많은 사람을 만나며 느꼈던 것들을 곱씹으며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고, 내 나름대로의 인생관을 찾다 보니 마음이 평안했다.
나는 노인회장님과의 인사를 끝으로 해상리를 떠나 건봉사로 향했다.
건봉사는 고성에서도 굉장히 깊숙하게 북쪽으로 들어가야 있는 사찰로 제법 오랫동안 걸어야 했다.
눈도 많이 쌓여있어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각오하고 걸어가는데 자동차 한 대가 내 옆에 멈춰 섰다. 알고 보니 마침 건봉사로 들어가시던 처사님이셨는데, 내가 혼자 조용한 도로를 걷고 있자 불러 세워보신 것이었다.
내가 먼저 도움을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오히려 나에게 도움의 손길을 먼저 내미는 분들을 몇 번이나 뵙고 나니 느끼는 바가 있었다.
건봉사에 도착하니 마침 길을 내려오던 스님께서 어떻게 오셨는지 물어오셨다.
나는 무전여행 중인 학생이며 지나가는 길에 잠시 들렀다고 말씀드리자, 마침 법회가 있으니 시간이 되면 참석해 보라 하셨고 나는 주저 없이 법회에 참석했다.
스님의 불경 외는 소리, 목탁을 두드리는 소리와 사찰 특유의 차분함이 어우러진 법회가 시작되었다. 나는 조금 알고 있는 경전을 따라 읽고, 절을 하며 법회에 참여하였다.
이후 나는 아버지, 어머니뻘 되는 분들과 함께 공양간으로 이동하여 식사를 하였는데, 많은 분들께서 내게 관심을 가져주셨고 젊은 친구가 혼자서 대단하다며 떡, 과일, 음료 등을 엄청나게 챙겨주셨다.
나도 쑥스러움을 많이 타는 성격은 아니어서 금세 어르신들과 친해지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공양을 마치고 갈 시간이 되었다.
어르신들은 함께 타고 오신 차량을 타고 돌아가셨고, 나는 건봉사를 좀 더 둘러보며 시간을 보내다가 다른 방향으로 가시는 처사님의 차를 얻어 타고 나갔다.
처사님은 나에게 어디에 내려다 주면 되는지 물으셨는데, 사실 딱히 목적지는 없었고 그저 좀 더 걷고 싶었다.
하여 건봉사에서 멀지 않은 석문리까지 부탁을 드렸고, 처사님은 그런 나를 석문리에 내려주셨다.
나는 처사님께 인사를 드리며 멀어지는 차량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마을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불안하지도 외롭지도 않았다.
오히려 나 자신과의 대화를 하느라, 그동안 만났던 분들과 나누었던 대화를 음미하느라, 인생의 의미를 찾고, 초심을 되찾고, 새로운 출발을 준비하느라 시간이 부족할 지경이었다.
석문교회는 '리'단위에 있는 아주 작은 교회였다.
군생활을 하며 이 교회를 자주 지나갔었는데, 마침 예배당 문도 열려있었고 목사님도 계셨기에 사정설명을 드리며 교회 안 작은 방에서 하루만 쉴 수 있도록 부탁을 드렸다.
목사님은 처음엔 난감해하셨지만, 내가 이 근방에서 군생활도 했었고 혼자라는 말씀을 들으시자 잠시 고민하시더니 작은 방 하나를 허락해 주셨다.
나는 운이 좋았다.
무전여행을 하며 많은 사람들을 만나 많은 도움을 받았고, 부처님, 예수님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주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내가 무전여행의 마지막 밤을 안전히 보낼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나는 석문리와 그 인근을 걸으며 한참 동안 시간을 보냈다.
무전여행의 마지막 밤이 지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