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국민을 경악하게 만든 강력 범죄자들에게는 어린 시절의 학대와 심한 트라우마가 있었음을 우리는 많이 보아왔다. 보통은 부모의 학대가 많았지만, 한 범죄자는 초등학교 때 담임교사에게 당했던 모멸감과 학대로 평생을 분노로 살아오기도 했다. 초등 교사의 딸로 태어나 초등 교사로 살았던 내게, 그 뉴스는 너무나 부끄럽고 또 부끄러웠다.
아무나 남의 앞에 서는 게 아니다. 특히 학생들을 가르치는 사람은 더더욱 그렇다. 내가 5학년 담임을 했던 오래전, 현정이라는 아이는 그림을 꽤 잘 그렸고, 장래희망이 화가라고 했다. 알고 보니 3학년 때 담임을 했던 교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부모나 교사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을 수밖에 없는 아이들이기에 아이와 더불어 살아가는 위치의 사람들은 정말 언행을 조심해야 한다.
1987년 3월, 화성시 송산 초등학교에 나는 첫 발령을 받았다. 설레는 마음으로 만났던 내 첫사랑들이 벌써 마흔일곱이다. 나처럼 초등 교사로 근무하는 제자도 있고, 약사, 치킨집 사장. 옷 가게 사장, 한의사, 정육점 사장, 태권도 학원 원장, 대기업 직원, 택배기사, 목사님 등등, 다양한 직업으로 각자의 터전에서 열심히 살아간다. 거의 20년을 학교에 머물면서 아주 가끔 내가 느꼈던 것은 '저 선생님은 학교보다는 다른 직업을 선택했으면 좋았겠다'였다. 내가 일일이 간섭할 수도 없는 것이고, 학생들의 경직되고 두려운 표정들이 내 마음을 종종 힘들게 했다.
그런 부류의 교사가 한 학급을 책임지다가 관리자가 되어, 전 교사를 통제하는 위치에 있게 되면, 학교 분위기는 정말 심각해진다. 내가 막내 교사로 있던 20대의 그 학교의 교감 선생님은 자주 나를 실망시키셨다. 언행을 함부로 했고, 즉흥적이었고, 보여주는 것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는 분이었다. 교사들은 자주 한숨을 쉬었고, 끼리끼리 모여 교감 선생님 험담을 했다. 그 강하고 나쁜 힘에 감히 저항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드디어 일이 터지고 말았다. 어떤 행사를 밀어붙이기 위해 한 교사를 희생시켜야 하는 일이었다. 그 교사는 산휴가 거의 끝나가고 있었고, 하혈로 몸이 말이 아닌 상태였다. 지금은 산휴에 이어 병가를 신청하면 되었을 일인데, 그 당시에는 법이 어땠었는지 잘 모르겠다. 산휴 몇 개월을 끝내고 미안한 마음으로 학교에 복귀해야만 한다고 그 선생님은 그리 생각했을 듯싶다.
교감 선생님은 걸스카우트 대원 160명을 합창대회에 내보낼 계획으로 공문을 작성하려고 했고, 합창지도를 할 수 있는 유일한 그 선생님은 몸 상태가 엉망이었고, 모든 교사들은 이건 아니다,라고 입을 모았다. 동 학년 선생님이셨던 교무, 연구 부장님께 용기 내어 말씀을 드려보라고 동료 교사들이 부탁을 했지만, 그 두 분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걸스카우트 부대장이었던 내게 그 선생님이 전화를 하셨다.
"학교에 나가서 아이들 수업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몰라. 몸이 너무 안 좋아. 제발 나를 좀 도와줘."
나는 그날 밤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학교 막내 순둥이 교사였던 내게 다음날은 역사적인 날이 되었다.
"교감 선생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학교 걸스카우트는 그동안 많은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왔습니다. 이번 행사는 교감 선생님께서 좀 배려해 주셨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그 선생님 몸 상태가 지금 몹시 안 좋고, 다른 교사가 대신할 수 있는 역할이 아니니, 이해해 주십시오."
교감 선생님은 깜짝 놀라셨다. 그동안 네네네, 하며 일하던 그 순둥 교사가 맞나? 그런 표정이셨다. 그분은 대답 대신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 내가 너희 아버지랑 친한 거 몰라?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아버지는 이웃 학교 교감이셨고, 교감 회의 때 자주 만나는 사이니, 친하다고 표현하셨을 것이다.
"교감 선생님! 저희 아버지 시라면 이 상황에, 행사보다는 교사를 먼저 살피셨을 거예요. 전 아버지를 그런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게 나일까? 내게 이런 면이 있었나? 나 스스로 놀라면서도 나는 당당하게 해야 할 말을 조목조목 다 했다.
그리고
교감 선생님은 나 몰래 행사 참여 공문을 내보셨고, 산휴를 끝내고 학교로 돌아와서, 아침 일찍부터 합창지도를 했던 그 선생님은 행사 참여 당일, 연습실에서 기절을 하고 말았다. 옆에서 합창지도 보조를 했던 내가, 행사장에서 합창 지휘를 했다. 그 일은 그렇게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