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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수아 Jan 07. 2024

주지 못한 편지

몇 년 전, 이 편지를 발견했습니다. 학교를 퇴직한 지 10년이 지났건만, 제 학교 보따리는 여전히 풀지 않은 상태로 있었습니다. 제가 쓰던 문구류와 여러 파일들을 보면서 많은 일들이 떠오르더군요. 그중에서 가장 마음이 아팠던 편지, 주인에게 주지 못한 편지가 있었습니다. 편지글을 작성하고 우리 반 아이들 숫자만큼 출력을 한 후 고운 색깔 봉투에 담아 졸업식 날에 나누어 주었지만, 이 편지는 아이의 졸업장과 함께 제 보따리 안에 있었습니다.


아이는 세련된 외모를 가졌고, 공부도 꽤 잘했습니다. 붙임성도 좋아 저와도 금방 친해졌지요. 그런데 아이가 마음의 문을 닫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아이를 만난 지 몇 개월이 지났을 무렵에 한 젊은 엄마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하필이면 아이들 하교 시간과 겹쳐 그 아이는 그녀의 방문을 알았지요. 아이들이 없는 교실에 진한 화장을 한 그녀와 상담이란 걸 했습니다. 아이 나이가 열셋인데, 그 엄마는 서른 살을 갓 넘긴 나이로 보였습니다.  


"선생님, 제가 00 새엄마예요. 아이 아빠 직장에서 경리를 하다 눈이 맞았지요."


너무나 해맑게 말하는 그녀는 참 행복해 보였습니다.


"00 동생이 지금 두 살이에요. 전 정말 좋은 엄마가 되고 싶은데, 아이가 저를 너무 미워하네요. 어쩌면 좋죠?"


'오, 하느님!'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그 순간 불편했던 제 마음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전 그녀에게 뭐라고 말했을까요? 전혀 기억이 안 나지만, 아이가 잘하는 점을 말하면서 무조건 사랑으로 잘 감싸주라고 말했을 겁니다. 그 엄마가 다녀간 다음날, 아이가 저를 바라보는 표정이 바뀌어 있더군요. 자포자기? 수치심? 그 절망적인 표정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그래도 다가가려 했지만, 아이는 끝내 마음의 빗장을 닫은 채 학교생활을 하다가 끝내는 졸업식 날, 학교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보통 졸업식 날에는 학생들보다 더 많이 울어 눈이 벌겋게 퉁퉁 부은 사진을 나중에 학생들에게 받곤 했는데, 그날은 그 아이가 없어서 제가 더 많이 울었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주로 수원과 그 주변 도시에서 교사 생활을 했는데, 교사로서 가장 어려운 학구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 학교에서 근무한 경험이 없지만, 학교에서 100 미터 정도 근방부터 쭈욱 이어져있는 술집들이 많았고, 학생들의 엄마들이 술집 주인인 경우가 많았던 거죠. 교대에서 배우는 초등 교사의 역할을 뛰어넘는, 아이들의 심한 음담패설과 묘한 눈빛은 교사들을 매우 힘겹게 했다고 하더군요.


​제 오랜 교직 생활 중, 그런 경험이 딱 한 번 있었습니다. 학교 어머니 총회에 진한 향수를 뿌리고 옷차림이 매우 야한 엄마가 다녀간 적이 있었는데, 훗날 수다스러운 한 여자아이가 제게 그런 말을 전하더군요. 그 아이 엄마는 늦은 시간에 술을 마신 채로, 어떤 아저씨 자가용에서 내리는 걸 동네 사람들이 자주 목격해서 엄마들이 쑤군댄다고요. 우리가 가끔 보는 드라마의 한 장면이었습니다. 드라마가 현실이고, 학교 또한 작은 세상이기에 이런 모습, 저런 모습이 엉켜있는 곳이기도 하니까요.


문제는 그 아이였습니다. 부잣집 도련님 같은 분위기의 아이는 못하는 게 없을 정도로 다재다능했습니다. 하지만 그 아이의 눈빛에서도 진한 수치심이 느껴졌습니다. 가끔 미소는 지었지만, 아이가 환하게 웃는 걸 본 적이 없습니다. 공효진이 나온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그 아들처럼, 아이는 친구들의 놀림을 많이 받고 살았을 테지요.


교사로 살면서 어쩌면 제가 가장 가슴 아팠던 아이들 유형이었던 것 같습니다. 비록 가난해도 당당한 아이들이 많지만, '수치심'은 그 작은 아이들에게 마음을 짓누르는 무거운 쇳덩이였을 겁니다.


저는 그 아이들이 어떻게 성장했는지 모릅니다. 잘 극복하고 당당한 어른으로 잘 살아가고 있기를 빌뿐이지요. 20년 가까운 교사 생활을 하며 제가 느낀 건, 교사란 아이들과 함께 희망을 노래하는 행복한 사람이지만, 때로는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슬픔'을 바라보아야 하는 아픈 직업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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