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버지가 용인 포곡초등학교에 계실 때 태어났다. 내가 다섯 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수원으로 전근을 오셨고, 나는 그 후 50년이 넘게 수원 토박이로 살고 있다.
아버지는 평교사로 아이들만 가르치다가 퇴임을 하시려고 마음먹으셨으나, 뒤늦게 관리자의 길을 준비하시느라 50대에 연천에 있는 학교에 근무하시기도 했다. 지난 2년 동안 주말부부로 생활했던 내가, 이 글을 쓰면서 우리 아버지도 몇 년 동안 주말부부로 사셨다는 게 떠올랐다. 월요일 새벽이면 5시도 되지 않아 집을 떠나 버스를 몇 번이나 갈아타며 출근을 하셨던 우리 아버지!
아버지는 두 학교의 교감을 거쳐 화성에 있는 정남초등학교에서 교장으로 근무하시다가 정년퇴임을 하셨고, 나는 화성 송산초에 첫 발령이 난 후 계속 수원에서 근무를 하다가 용인 신갈초에서 근무하다 건강이 좋지 않아 40대 초반에 학교를 떠났다.
책을 좋아하는 것도, 교사의 길을 걸었던 것도, 세상 물정에 어두웠던 것도, 잘 웃고 눈물이 많았던 것도 닮았던 우리 부녀였다. 현관에 신발을 가지런하게 놓으라는 말씀을 나는 아직도 잘 지키고 있으며, 사람을 함부로 무시하지 말라는 말씀도 지키려 노력하고 있다.
나의 아버지는 십여 년 전에 돌아가셨다. 나는 슬프다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막막함에 피를 토하듯 울었다. 내 차가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아버지가 없는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랐다. 갈치를 발라주셨던 아버지가 갈치를 볼 때마다 생각났고, 여고 3년 내내 딸의 밤길이 염려되어 버스정류장에서 기다리시던 아버지를 나는 잊을 수가 없었다. 나의 집안 곳곳에 가득한 책들을 보면, 아버지가 책 읽으시던 모습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 옆에는 같이 엎드려 동화책을 읽고 있던 어린 내가 있었다.
깊은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즈음, 내가 사는 아파트 수요시장에서 머리가 백발인 할아버지가 아기 없는 유모차를 끌고 나오신 것을 보았다. 나는 내 아버지를 본 듯 그리로 달려가 할아버지께 말을 걸었다. 할아버지는 아픈 아내 대신 장을 보러 나왔다고 하셨다. 나는 급하게 지갑을 열었다. 그 안에 만 원짜리 세 장이 들어있었다. 나는 얼른 할아버지께 돈을 드리면서, 할아버지를 뵈니 아버지가 생각나서 그러니, 이 돈으로 장 보시는데 보태시라고 했다. 다행히 할아버지는 그 돈을 받으셨고, 난 깊게 고개 숙여 인사를 드리고 자리를 떠났다.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퇴직을 했다. 내 인생길을 안내하신 분이셨으니 당연히 퇴직에 관해 의논을 드렸어야 했지만, 아버지는 중풍이 심해져서 혀가 마비된 상태였다. 결혼 이후 시집살이에, 워킹맘 노릇에, 막중한 책임감으로 지쳤는지 나는 자주 아팠고, 입원도 많이 했었다. 퇴원하고 돌아온 어느 날에 우리 집에 오셨던 아버지가 내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힘들면 학교 그만둬라."
난 그 당시에 퇴직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 말씀을 떠올리며 퇴직을 단호히 결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