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람곰 Jun 17. 2023

[순간의, 스위스 #2] 취리히의 계획하지 않은 날들



인생에서 내가 제일 싫어하는 한가지를 꼽으라면, 아마도 계획대로 되지 않는 삶이 아닐까, 아니, 아니었을까 싶다. 원래 인생에 빈 틈을 주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인생에 틈을 주는 건 어쨌거나 삶을 full로 살지 않는다와 동의어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30대 후반에 접어서니 그 모든 빡빡함에도 다 댓가가 따르는거란 걸 알게 됐다. 너무 많은 걸 써대며 공부해 이미 나가버린 오른쪽 어깨와 사무직의 숙명인 거북목, 그리고 예전만큼 해낼 수 없는 나 자신에 대한 자괴감까지. 빚도 자산이라지만, 20대에 모든 삶을 빼곡히 채우려 영끌한 나머지 스스로에게 너무 많은 짐을 지운 것 같은 요즘이다.




그래서 달라지려고 노력중이다. 여전히 큰 틀에서 많은 일정들을 계획하지만, 모든 퍼즐의 조각들을 맞춰놓은 채 계획대로 움직이지 않으려 노력한다. 내가 해낼 수 있는 양은 얼만큼인지 충분히 생각하고, 또 동시에 나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려 노력한다. 그래야만 남은 내 삶을 불난 호떡집 대신 어엿한 맛집(이지만 알바는 싸가지없는^^)으로 살아낼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갑자기 계획을 바꿔 오는 길에 보았던 예쁜 호숫가 마을을 찾았다. 지명이나 위치 등 아무것도 알 수가 없어서 일단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기차를 탄 뒤 풍광에 몰두하다가 ’여기다!‘ 싶은 곳에서 내렸다. 그런데 생각보다 멋있진 않았다. 사실 모든걸 알아보고 오지 않았으니 뭘 봐야 할지 어디로 가야할 지 알 수 없는게 당연했다. 그럴땐 어떻게 하지?




호숫가에 앉아 곰곰이 생각하다, 고민 될 땐 일단 천천히 내 속도로 걸어보기로 했다. 기차를 타고 오면서 스쳐갔던 많은 풍광들을 눈에 담고, 또 마음에 새기기엔 이만한 방법이 없지 싶었다. 그래서 걸었다. 무작정 기차역 하나 길이를 정하고 말이다. 걷다가 배가 고프면 마트에 들러 샌드위치를 사먹고, 또 걷다가 힘들면 잠시 벤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을 관찰하고, 저 멀리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상상하며 쉬다 걷다를 반복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기차역 한 정거장을 온전히 걸었다. 그 어떤 가이드북에도 나오지 않는 시골 어느 마을 사이를 걸었던 일. 그러나 오늘 하루 눈덮인 알프스를 본 일보다, 알프스 소녀 하이디의 흔적을 만난 일보다, 온전히 내 방식과 속도대로 집중해 걸었던 이 시간이 가장 소중했다. 답은 누군가 정해주지 않는다는 말. 나는 미련한 인간이라 이렇게 ’살아보고서야‘ 작은 한 발을 내딛을 수 있는지도 모른다.



이전 02화 [순간의, 스위스 #1] 하이디 마을, 마이엔펠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