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어트하다 보면 신기하리만큼 위가 줄어든다. 아주 평범하고 보편적으로 먹는 사람인 나도 예외는 아니다. 다이어트하다 보니 위가 줄었다!
피자를 두 조각 먹으니 배가 불렀다. 응? 내가? 피자란 일단 두 조각 먹고 입맛을 돋운 뒤 본격적인 식사를 시작하는 거 아니었어? 이제 겨우 두 조각 먹었는데 벌써 배부르다고?
“더 먹어.”
“배불러.”
배부르단 말에 그럴 리 없다는 듯 믿지 않으며 피자를 더 먹으라고 권하는 금비와 케이.
“넌 몇 조각 먹었니?”
금비에게 물었다.
“네 조각.”
“자기는?”
“나도 세 조각 먹은 거 같은데.”
“와, 대단한걸!”(내 입에서 나온 소리?)
“더 먹어.”
케이가 권한다.
“진짜 배불러.”
이게 무슨 일인지 고개를 갸웃한다. 다이어트한다고 맘에도 없는 사양을 하는 것이 아니다. 살이 안 찌는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진짜 배가 부르다. 배부르다는 내 말이 믿길 리 없는 금비와 케이가 남은 피자는 다 내 거라는 듯 친절하게도 동시에 권한다.
“나 진짜 배불러. 세 조각 남았으니까 포장해가서 효자 아들 주자.”
“역시 효자 아들 엄마네. 아들 주려고 양보하는 거야?”
모성 때문인 줄 알고 격하게 감격하는 케이. 그게 아니라니깐. 왜 믿지를 못하니? 나 피자 좋아한다니깐. 나도 더 먹고 싶다니깐. 다섯 조각 먹고 싶다니까. 근데 진짜 배부르다니깐. 두 조각이면 잘 먹었다는 생각이 든다니깐.
배부르다는 말을 듣지도 않고 믿지도 않고 효자 아들 먹이려는 모성으로 혼자 잔뜩 감격한 케이가 거듭 제안한다.
“한 조각만 더 먹어.”
“진짜 배부르다니깐.”
“그럼 자기가 반 먹고 나 줘. 내가 도우 먹을게.”
배불러도 더 먹을 거라는 걸 아는 케이의 그러지 않아도 되는 챙김에 결국 두 조각하고 반을 먹었다. 먹으면서 생각했다. 얼마나 먹었다고, 도대체 왜 배가 부른 거지?
피자 킬러인 내가 두 조각밖에 못 먹다니. 그것도 기름기라고는 없는 화덕 피자를. 배부르면 한입도 더 안 먹는 금비와 케이보다 못 먹다니. 금비도 네 조각을 먹었는데 나는 고작 두 조각에 배부르다니. 이럴 수가! 얇고 부드러운 화덕 피자라면 최소 네 조각은 먹는 거 아니었어? 도대체 내 위에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이렇게 소식 좌가 되는 건가? 이래서 날씬한 사람들은 계속 날씬하구나. 날씬한 사람들은 날씬한 이유가 있는 거구나.
◎ 마른 사람들은 이유가 있다.
정식으로 다이어트하는 거는 두 번뿐이지만, 다이어터답지 않게 잘 먹긴 하지만 다이어트에 관해서라면 나도 어지간한 전문가다. 이유는 이렇다. ⓵ 10킬로그램 감량에 성공했고, ⓶ 40대가 되기 전까지 무려 이십여 년 동안 날씬한 체중을 유지했다. ⓷ 현재 두 번째 다이어트도 성공 중이다.
게다가 학계에 보고되지 않은 민간의 임상실험 비슷한 데이터가 풍부하다.
주변에 온통 다이어트하는 사람들(주로 여자들)이다. 약 삼십 년간 그녀들의 다이어트 성공과 실패와 요요현상의 과정을 지켜본 입장으로서, 다이어트에 매여 있는그녀들과 평생 살아온 입장으로서, 나도 다이어트라면 일가견 있고 할 말 많은 전문가다.
외모가 중요하다는 사회에서 평생 여자 사람으로 살았다. 마른 인간들에게 포위당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정도로 내 주변엔 온통 마른 인간들뿐이다. 평생 살찐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시는 부모님(왜들 그렇게 부지런하신거야), 갈색 지방이 많아서 살이라곤 쪄 본 적 없다는 케이(마른 사람은 타고난단 말인가). 먹으면 정직하게 찌는 나와는 다르게 어떠한 이유인지 살이 찌지 않는 마른 형제들(유전자 몰빵한 것들), 그리고 노력파로 완성한 살이 찌지 않는 날씬한 지인들.(왜들 그렇게 날씬해지는 것까지 노력하는 거야)
마른 인간들에게 포위당해 산 사람으로서 의도치 않게 마른 인간들을 평생 관찰할 수 있었다. 오랫동안 마른 인간들을 관찰해 본 결과 그들은 살이 찌지 않을 수밖에 없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살이 찌는 데는 뭔가 이유가 있는 것처럼 마른 사람들에게도 마른 이유가 있다. 마른 사람들을 관찰해 보면 살 빼는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그들은 새 모이만큼 먹고 배부르다며 적게 먹는다. 그들에게 일 인분의 양은 생각보다 적다. 잘 먹는다고 하는데 많이 안 먹는다. 그 정도로 먹어선 살이 찌지 않는데 말이다. 마른 인간들도 같은 말을 할 것이다. 안 먹는다더니 많이 먹는다고. 그 정도로 먹어선 살이 빠지지 않는다고.
그들은 체중 변화에 민감하다. 내가 아는 마른 사람(여자)은 171센티미터에 53킬로그램 나간다. 마흔 살까지 쭉 50-51킬로그램, 삐쩍 마름을 유지하던 그녀는 최근 들어 살이 좀 쪘다고는 하나 내가 보기엔 가당치도 않은 말라깽이다. 171센티미터에 51킬로그램이나 53킬로그램이나 외관상 전혀 티가 나지 않는데도 살이 쪘다며 마른 사람의 언어로 말을 하고, 나 살쪘지?라고 마른 사람의 언어로 질문한다. 하나도 안 쪘는데,라고 건장한 내 기준으로 대답하면 아니야, 나 살쪘어,라며 믿지 않는다. 어쩌라고.
그들에게는 날씬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그들은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살찔 틈을 주지 않는다. 남들보다 빠르게 움직이고 많이 움직인다. 본인은 게으르다는데 가만 보면 되게 부지런하다. 가만있질 않는다. 할 일이 없을 땐 정리라도 한다. 사부작사부작 거리며 무언가를 하고 있다. 살 좀 찌고 싶다면서 살이 찌도록 몸을 내버려 두질 않는다. 컵 하나라도 있으면 바로 치운다. 이런 거 두고 못 본다나, 뭐라나, 마른 사람의 언어로 말하면서 부지런히도 치운다.
그들은 달달한 음료, 군것질, 달콤한 케이크 같은 거 안 즐긴다. (놀랍게도) 단 거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한다. 안 좋아한다는데 무슨 할 말이 더 있겠어?
개중에는 살이 찌는 걸 몹시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다. 살찌면 몸이 무겁다나, 어쨌다나, 마른 사람의 언어로 말하면서. 내 몸을 들어 올리기엔 몸은 원래 무거워. 딱 그만큼의 중력을 적용받거든. 마른 사람들은 1킬로그램만 쪄도 몸이 찌뿌둥하다거나, 무겁다고 마른 사람의 언어로 말한다.
오랫동안 마른 사람들을 관찰한 결과,
그들은 마르도록 프로그램 된 사람들인 거다. 생태계의 아름다운 조화와 잔잔한 균형을 위해 마른 사람이 일정 비율로 태어나야 하는 게 틀림없다. 남녀 성비처럼 마른 사람도 일정 비율로 태어나는 것이 틀림없다.
사회는 이렇게 말한다. ‘비만은 개인의 질병이며 사회적 질병이다. 비만은 치료해야 하는 질병이다. 비만은 사회적 비용이 발생하는 커다란 사회문제다.’ 비만으로 발생하는 사회적 비용을 함께 부담하는 사회 구성원들은 움직이기 싫어하는 게으름, 노력을 하지 않는 나태함, 식욕을 조절하지 못하는 의지 부족이 비만의 원인이라고 판단하며 조롱을 서슴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날씬함을 선호하는 걸까. 식탐 많은 게으름뱅이로 보이기 싫어서 나는 다이어트하는 걸까. 내가 마흔 넘어서 느닷없이 다이어트를 하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뭘까.
표면적으로는 꽉 끼는 바지 때문이었다. 옷을 맵시 있게 입고 싶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었다. 그런데 나는 왜 옷을 예쁘게 입고 싶은 걸까. 나는 왜 날씬한 나를 선호하는 걸까. 날씬해지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을 보아온 내가 다른 사람들의 눈 때문에 다이어트하는 것이 아닌 것이 맞을까. 외모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회에서 날씬한 사람들이 찬사와 환호를 받는 것을 보며 성장한 내가 ‘날씬함’을 선호하는 사회 분위기와 나의 다이어트가 무관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외모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회 분위기의 영향을 받지 않고 온전히 내 의지로 다이어트하고 있는 걸까. 날씬한 나를 보며 만족하는 것은 자존감일까, 자기 관리 잘한 사람들에게 자격을 내어 주는 사회 분위기에 안착한 것 같은 안도감일까. 진짜 내 감정, 내 의지는 무엇일까. 외모가 중요하지 않은 사회에서 살아본 적이 없어서 어떤 대답도 확신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