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도, 고통도 치워 버리면 되지

유리조각의 최종 먹잇감이 나라서 다행이야

by 비단구름

이십 리터짜리 쓰레기봉투가 거의 차 있어 조금 더 담고 버리기 위해 봉투 안의 쓰레기를 누르던 알뜰한 나. 앗, 레이저 검이 스치면 이런 감촉이겠지. 뜨겁고 예리한 것이 손바닥을 재빠르게 지나갔다. 일 초, 이 초, 쳐다보고 있자니 곧 손바닥에서 지하수가 솟아 올라오듯 빨간 피와 뜨거운 고통이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아, 병조각 있었지. 까먹었네.”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던 마을 산책로에 초록색 소주병이 깨져 있다. 쨍하고 깨져 큰 덩어리 두세 조각을 제외하곤 작은 조각으로 산산이 부서졌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할머니도 깨진 소주병 조각을 보았다. 맑고 깨끗한 날이었는데 앞일을 예견이라도 한 것처럼 우산을 손에 들고 있던 할머니가 허리를 구부리고 우산 끝으로 병조각을 가장자리로 밀었다. 마치 오 분 뒤에 이런 일을 할 거라는 걸 예지하여 우산을 들고 나온 것처럼 지금 이 순간 우산의 용도는 깨진 소주병을 치우기에 딱 적합한 도구였다.


우산 꼭지로 깨진 소주병의 큰 덩어리들을 가장자리로 쓱쓱 밀다 안 되겠던지 할머니는 무릎을 굽히고 허리를 앞으로 더 숙이더니 작은 조각들을 손가락으로 주워 산책로 가장자리로 툭, 툭, 던지듯 밀어 모았다. 마침내 할 일을 마친 할머니가 허리를 펴고 일어나 십여 미터쯤 거리에서 다가오고 있는 나를 무심하게 쓰윽, 보더니 역할을 해낸 우산과 함께 곁을 지나간다.


‘이제 네 차례야.’


바통을 이어받은 것 같은 비장한 기분이 드는 한 편 갈등이 인다.


치울까, 말까.


산책로는 놀이터와 인접해 있다. 놀이터에서 놀던 아이들에게 놀이터와 산책로의 경계는 무의미하다. 언제고 산책로로 진입하기도 하는 것이다. 산책로와 놀이터의 경계는 이십 센티미터 높이쯤 되어 보이는 울타리가 둘러있는데 아이들에게 그깟 울타리는 초록색 쇳덩어리를 예쁘게 구부려 놓은 나뭇잎 모양 장식일 뿐이다.


놀이터에서 산책로로 이리 뛰고 저리 뛰어다니던 아이들이 울타리에 발이 걸려 뾰족하고 날카로운 조각 위로 넘어지면? 하필 얼굴을? 으악! 잔인하다. 막아야 한다!


이 길은 사람뿐만 아니라 강아지들도 애용하는데 산책로를 걷던 강아지 발바닥에 섬뜩한 유리 조각이 박히기라도 하면? 으악! 끔찍하다. 막아야 한다!


아르바이트 가는 청년의 운동화나 사직서를 품에 넣고 지하철을 타러 가는 아저씨의 구두 발바닥에 박히면? 으악! 생각만으로도 몹시 신경을 거슬린다. 막아야 한다!


내 아이들이 밟거나 유리 조각 위로 넘어지면? 으악! 최악이다. 막아야 한다!


저기에 깨져 나뒹구는 술병 조각이 있는 걸 알면서도 까먹고 돌아오는 길에 내가 밟으면? 으악! 생각도 하기 싫다. 막아야 한다! ‘내 알 바 아님(non of my business)’의 교훈에 대해서는 스파이더맨 엉클의 비극적 죽음을 통해 배웠지 않은가! 원래 이렇게 솔선수범하는 부류의 사람이 아니더라도 치울 이유가 이렇게나 다양하다 보니 치우는 수밖에 별도리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누구라도 이 상황에선 마찬가지였을 거다.


놀이터에서 술 처먹고 술병 깨뜨려 버린 놈, 아니 년, 아니 인간, 이 자업자득으로 깨진 술병 위에 콕 자빠져 대가리 아니 무르팍이라도 깨져 버리면 좋으련만, 아이코, 방금 막 상관없는 타인을 위해 티 안 나는 선을 행하기로 결심해 놓고 이렇게 사악한 생각을!


‘그나저나 저 유리 조각을 어쩌나?’


‘두 손에 살포시 담아 놀이터 화장실에 버려야 하나? 그동안 강아지 줄은 누가 잡고 있지?’


최선의 해결 방안을 강구하는 동안 오늘따라 무거운 똥 봉투가 손가락에 매달린 채 덜렁거린다. 분홍색 반투명 똥 봉투에는 강아지 똥이 한 줌 들어있는데 매번 조약돌을 한 움큼 집어 집에 가져가는 묵직한 기분이 드니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다. 똥 봉투? 그렇구나! 나에겐 똥 봉투가 있잖은가! 함께 산책하다 영문도 모르고 아까부터 기다리고 있던 강아지가 그걸 이제 알았냐는 투의 지루한 눈빛을 보낸다.


소주병은 밑동과 대가리 부분만 사 센티미터 정도 살아있고 몸통 부분은 박살이 났다. 이게 이런 모양으로 산책로에 나자빠져 있으려면 누가 밟아서는 될 것도 아니고, 냅다 땅바닥에 패대기 정도는 쳐 주어야 틀림없이 이 꼴이 나는데, 간밤에 놀이터에서 술 처먹던 사람에게 어떤 심경의 변화가 생겨 달밤에 소주 한잔하다 성질이 버럭 나 술병을 바닥에 내리 던졌을까, 궁금한 한편, 이제 오밤중에 나와 소주병을 들이켤 만큼 속이 문드러지는 일은 사라졌기를, 술병을 던져버릴 만큼 열불이 나는 일도 좀 해결되어 마음이 평안해졌기를 바라본다.


“하나, 둘, 셋.”

유리 조각을 줍다 호기심이 발동한 나는 병 조각을 세기 시작했다. 셀 수 있는 것만 열다섯 조각이었다. 정갈한 마음으로 깨진 병 열다섯 조각을 봉투에 옮겨 담는 동안 알게 모르게 지은 나의 죄와 그로 인한 마음의 고통도 씻어졌을까? 큰 조각을 주워 담고 작은 조각들을 하나씩 손으로 집어 똥 봉투에 담고 나니 바닥엔 바닷가의 모래 같은 초록의 고운 입자만 남아 햇살에 반짝거린다. 이만하면 이 위로 자전거 바퀴가 지나가도, 예쁜 아가씨의 삼만 원짜리 구두가 지나가도, 아이가 밟고 넘어져도, 강아지의 도톰한 발바닥이 밟고 가도 괜찮을 거야,라고 여겨질 정도로 유리 조각을 손으로 집어 담는 동안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엔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다. 고맙게도 유리 조각은 내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은 것이다.


유리 조각인 줄 알면서 손에 힘이 들어갔을 때, 꽉 쥐면 다칠 걸 알면서 세게 움켜쥐었을 때 몸도 마음도 베인다. 가시 달린 장미를 꽉 쥐는 것과 같다. 간혹 드라마에서 유리 조각을 줍다 아얏, 하면서 손가락이 베이고 피가 나는 장면이 연출되는데 날이 선 유리 조각이라 할지라도 힘을 빼고 살포시 잡는다면 드라마에서처럼 베일 일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


드라마에서 유리 조각을 집다 손가락을 다치는 경우는, 가령 관심 있는 이성이 근처에 있어 그렇게 해서라도 이목을 끌고 관심을 받아야 하거나(혼자 있었다면 아마 베이지 않았을 것이다), 주의력이 몹시 부족한 부주의한 사람이거나, 뭘 시키면 꼭 일을 하나 더 만들어 더 이상 일을 시키느니 차라리 내가 하고 말지, 하게 만드는 손 많이 가는 동료이거나, 아니면 나처럼 유리 조각인 줄 알면서도 까먹고야 마는, 아이큐는 세 자릿수이나 건망증이 있는 경우다.


똥 봉투에 유리 조각을 담아 집으로 가지고 와 쓰레기봉투에 넣어 놓은 걸 까먹고 기어이 피를 보았다. 드라마와 달리 베인 순간 신속하게 다가와 팔자 눈썹을 만들며 “괜찮아요?”라고 말을 건네며 걱정해 주고 “조심 좀 하지 그랬어요!”라고 사슴같이 슬픈 눈망울로 함께 아파해줄 멋진 남자는 없다. 집에는 나 혼자뿐이다.


그래도 어쨌든 저 유리조각의 최종 먹잇감이 나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고통을 잘 견디니까. 쓰레기처럼 고통도 그저 치워 버리면 그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