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
깜짝 놀랐습니다.
오래전 애인의 詩가 책에 실렸습니다. 변하지 않은 사진과 함께.
그 책은 친구의 친구가 전해주었습니다.
오래전 애인은 어떠한 거리를 詩로 썼는데
그 거리에 대해 기억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미안하다"라고 했습니다.
어떤 풍경이었을까. 기억에 없다는 거리를 손가락으로 줄을 그으며 따라가 보았습니다.
내게도 기억이 없는 거리였습니다.
이름은 분명 오래전 애인인데,
사진은 분명 비껴간 웃음을 지은 채 그대로 실렸는데,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은 그의 '솔직함'이었습니다.
믿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세월을 걸어 무엇을 지우며 살아왔을까요.
그의 모습과 이름과 웃음은 알겠는데, 이상하게 그 거리만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친구의 친구가 실없이 웃으며 전해 준 한 권의 시집은
가늘고 끈적이는 거미줄투성입니다.
그는 여전히 그 거리에 주저앉아 몇 가닥 詩를 풀고 있었던 것일까요?
가엾게도 이제 와서 나는 거미줄에 덥석 걸려
'이별'에 대해 기억하려 애쓰고 있습니다.
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여전히 나는 말합니다.
사랑은 유행가 가사에서 찾아야 하며
진실은 전단지의 굵은 활자에 얹어있고
영원에 관해서라면 詩를 쓰지 말 것을
나는 詩를 두고 언약하지 않았습니다.
사랑에 관해서라면 더욱더,
혼자 있는 긴 시간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이별이라는 단어를 채색하기 좋아합니다.
홀로라는 두려움이 무엇인지 모르는 까닭에 쓸데없이 세월을 탓하게 됩니다.
슬픔의 도가니에 빠져 시 몇 편 말끔히 낳고
여전히 비껴가는 햇살처럼 웃고 있는 나의 오래전 애인이여!
만약, 오랜 시간이 지나 내가 시를 쓴다면
시를 쓸 수만 있다면,
그리하여 누군가 불쑥 나의 시집을 그대에게 전해 준다면
나의 사진이 함께 실렸다 하더라도
글 속에서 그대를 찾지 마십시오.
우리의 사랑이 그 행 어디에 숨어 있는가. 묻지도 따지지도 마십시오.
마른 밤, 마른바람을 맞으며 시인의 흉내를 내어
시라고 몇 줄 쓸 수는 있겠으나
나는 차마 지워진 것들을 채색할 수 없을 겁니다.
나의 오래전 애인이 쓴 시집을 가만히 덮습니다.
더 이상 물을 것이 없음을 압니다.
미안하다.라는 말은
사랑하는 동안에 미리 해야 하는 것임을 알려 줄 것을 그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