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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나무

by 숲song 꽃song
『옆집 엄마는 무슨 재미로 사나?』에서는 옆집 엄마(숲 song 꽃 song)가 마흔 즈음에 쓴 습작글 중에서 누구에게나 있지만, 누구에게도 없는 일상이야기를 하나씩 꺼내어 연재합니다. 담장너머 옆집 엄마네 살아가는 이야기 속에서 작은 웃음, 조그마한 삶의 팁이라도 챙겨가실 것이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거예요.


오랜만에 둘이서 걷는 산길이 오붓하고 정답다. 찬란한 가을햇살과 시리도록 푸른 하늘빛이 모처럼의 산행에 경쾌함을 더해준다.


'이곳에 올라설 때마다 비로소 산속 깊이 들어섰구나 하는 생각에, 지나온 길을 꼭 한번 뒤돌아보게 되는 곳이지.'

가뿐하게 고개를 올라서며 남편이 말했다. 또 한 고개를 올라서니, 산책하듯 걷기에 딱 좋은 솔 숲 오솔길이 나왔다. 남편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나란히 서있는 두 그루의 소나무를 양팔로 잡으며 숨겨둔 비밀을 털어놓듯 내게 말했다.


'나의 나무친구야, 이곳을 지날 때마다 이렇게 나무를 잡고서 나무의 숨결을 오래도록 느껴보곤 해, 이렇게 한참을 서있다 보면 마음은 이윽고 평온하고 고요한 상태가 되지.'

부드럽게 나무를 쓰다듬는 남편의 얼굴이 나뭇가지사이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에 눈부시게 화사해졌다. 문득 남편과 나무가 나직하게 주고받았을 무언의 이야기들이 궁금해지며, 나도 모르게 슬며시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육아를 핑계로 남편에게 너무 소홀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둘째가 태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남편과 참으로 많은 것들을 공감하고 공유했었다. 문학과 예술에 대한 공통관심사가 있었기에, 술 한 잔에 서로 좋아하는 시를 번갈아 낭송해 주며 새벽을 맞이한 날이 많았었다. 한 때 클래식에 심취했던 그의 이야기와 음악을 들으며, 날이 새는 줄 모르기도 했었다. 막 피어나는 꽃을 보았을 때도, 햇살이 눈물겹도록 고울 때에도 그와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에 전화통으로 달려가기 바빴었다. 온통 남편에게로 가 있던 나의 사랑과 관심은 둘째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 아이들에게로 온전히 옮겨가더니, 생활도 이내 아이들 중심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이들하고 함께 놀아줄 시간은 있어도, 남편과 함께 할 시간은 좀처럼 내기 힘들었다. 눈덩이 굴러가듯 점점 한 덩어리가 되어 가는 내 모습을 지켜보며, 남편은 가끔씩 '예전의 내 모습이 그립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때마다 '다 큰 어른이 질투하느냐?'며 장난처럼 무심하게 받아들이곤 하였다. 그런 세월이 어느덧 10년이 넘었다.



올 들어 나의 생활에 지각변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고학년이 되더니 가족보다는 친구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더욱 좋아하게 된 것이다. 이제 주말이 되어도 아이들은 집에 있는 시간보다 친구와 함께 있는 시간이 더 많다. 늘 아이들과 함께 주말을 보냈던 우리 부부는 갑자기 할 일이 없어져버린 듯 막막해졌다. 나나 남편이나 아이들 없이 단둘이 마주하고 있는 자리가 영 어색하고 낯설었다. '자식들에게 온갖 정성 쏟아보았자 커버리면 그만이니, 늙어서 서로 등이라도 긁어줄 부부간에 더 재미있게 살아야 한다.'라고 했던 인생선배들의 말뜻을 이제야 알 것 같다.

오늘 아침, '날이 화창하니 산이나 다녀오자, '는 남편의 말에 얼른 뒤따라 나선 것도 그런 연유에서였다.



한없이 따뜻한 눈길로 나무를 바라보고 있는 남편의 얼굴빛에서 언뜻언뜻 총각 때의 맑고 순수했던 모습이 어른거렸다. 불현듯 '그동안 미뤄두었던 나의 빈자리를 혹시 이 나무들이 채워준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얼마 전에 읽었던 책 속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나무는 한 번 자리를 정하면 절대로 움직이지 않아. 차라리 말라죽을지라도 말이야. 나도 그런 나무가 되고 싶어."


남편의 나무에 얹었던 손을 거두고 다시 발걸음을 옮기며, '쉼 없는 변화와 성장 속에서도 언제나 한결같이 그 자리를 지켜주는 나무, 남편에게 나도 그런 나무가 되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서 걸어가는 남편의 발걸음이 새털처럼 가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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