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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의 유희

by 숲song 꽃song Jan 21. 2025
『옆집 엄마는 무슨 재미로 사나?』에서는 옆집 엄마(숲 song 꽃 song)가 마흔 즈음에 써둔 글 중에서 누구에게나 있지만, 누구에게도 없는 일상이야기를 하나씩 꺼내어 연재합니다. 담장너머 옆집 엄마네 살아가는 이야기 속에서 작은 웃음, 조그마한 삶의 팁이라도 챙겨가실 것이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거예요.



 우리 가족은 봄이 오면 봄 몸살을 심하게 앓는다. '봄이 왔다'싶으면 서둘러 봄을 찾아 떠나지 않고는 못 배긴다. 올해는 어찌 된 일인지 3월이 지나 4월에 접어들었는데도 꼼짝을 하지 않았다. 직장생활을 조금 여유 있게 하고 싶었던 내가, 주말이면 일거리를 집으로 잔뜩 싸들고 왔기 때문이다. 한 번 봄바람이 나면 그 봄을 만끽해야만 비로소 마음을 잡을 수 있다는  잘 알고 있기에, 혹시라도 마음 들썩일까 봐 애써 외면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게 어디 쉽나? 먼 산에 진달래가 피었다지, 버드나무에 새 잎이 돋아 꽃보다 아름답지, 햇살은 통통거리지…. 아무리 눈을 감고 귀를 닫으려 해도 봄 정취에 그만 질 수밖에 없었다.


 토요일 아침, 드디어 남편에게 외쳤다. "오늘은 만사 제쳐두고 무조건 떠나자, 봄기운에 흠뻑 젖어 자."라고 말이다. 하지만 퇴근 무렵이 되니, 아침의 호기로움은 어디로 사라지고 그만 또 마음이 바뀌었다. 훌쩍 떠났다가 돌아왔을 때 눈앞에 쌓여있을 일거리가 끝내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실망한 남편은 혼자라도 다녀오겠다며 짐을 챙겨 나섰다. 미안한 마음으로 남편을 보내놓고, 밀렸던 학교일과 집안일을 하면서 그저 그런 한나절을 보냈다.


 저녁이 되자 남편은 혼자서 무얼 하고 있는지 궁금하여 전화를 했다. 핸드폰 소리는 툭툭 끊겼다가 이어졌다. 어디냐고 묻자, 지리산 피아골 계곡에서 여태 봄기운을 만끽하다가 숙소로 내려가는 중이라고 했다. 그러더니 다짜고짜로 이곳의 아름다움을 혼자 누리기 아까우니 지금이라도 당장 아이들과 택시타고 달려오라고, 지금 아니면 다시는 못 느낄 일생의 단 한 번뿐인 이 순간을 다 함께 느껴보자고 했다.

순간, '그래, 가볼까?' 하는 생각이 일었다. 옆을 보니 아이들은 이미 잠들어 있었다. 밤길에 전주에서 구례까지 택시를 타고 가는 것은 비용도 만만치 않을뿐더러 위험하기도 했다. 당장은 무리일 것 같으니 다음날 최대한 서둘러 그리 가겠노라고 약속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기차 편, 버스 편을 모두 알아보니 가장 빠른 것은 새벽 5시 21분 하행선 완행열차였다.


 새벽출발을 위해 서둘러 잠을 자려했지만 '느닷없는 떠남'으로 흥분된 마음이어서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잔둥 만둥하는 사이에 새벽 자명종소리가 울렸다. 4시 20분. 혹시 잠들어 종점까지 가는 일이 없도록 배낭엔 자명종까지 하나 더 챙겨 넣었다. 문밖을 나서니, 모두가 잠들어 있는 새벽에 우리끼리만 어디로 떠난다는 은밀한 즐거움은 새벽공기처럼 짜릿했다. 아슬하게 올라탄 열차는 텅텅 비어있었다. 우리는 각자 편하게 몸을 부린 후, 보이지도 않는 창 밖을 바라보며 좀처럼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기차를 타고 30분쯤 달리자 먼동이 트기 시작했다. 큰아이는 졸린 듯 잠잘 자세를 취했다. 둘째는 오랜만에 기차를 타게 된 흥분으로 끊임없이 재잘대었다.


 남편과 만나기로 한 곳은 구례역. 낯선 곳에서 느닷없이 만나기로 한 약속은 오랜만에 마음을 설레게 했다. 남편은 제시간에 맞춰 역사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곧장 우리를 태우고 지리산 피아골로 달려갔다. 달리는 도중 남편이 웃으며 말했다. 한밤 중 밖이 환한 느낌에 눈을 떴더란다. 늦잠을 잤다는 생각에 정신없이 옷을 챙겨 입고 방문을 나섰는데, 휘영청 보름달이 환하게 웃고 있더라나! 잠이 깨어버린 차에, 활짝 문 열어놓고 이불을 두르고 달구경하며 꼬박 날을 샜다고 했다.


드디어, 피아골 도착.

아아!

막 돋아나는 순하고 여린 나뭇잎들,

유난히도 붉은 진달래 꽃 무리들,

나도 좀 봐달라는 듯 발돋움하고 있는 발 밑의 풀꽃들….


양말 벗고 신발 배낭에 묶어 매달고 물가로 내려갔다. 바위에서 바위로, 계곡의 바위들만을 골라 딛거나 건너뛰며 계곡물 따라 거슬러 올라가 보기로 했.


이름하여

 '계곡 탐사'

 지리산 계곡답게 큰 바위들이 줄지어 있고 물은 크고 작은 소를 이루며 시원스럽게 흘렀다. 맨발에 닿는 바위의 감촉은 시원하고 간지러웠다. 바위마다 발에 닿는 감촉은 참 다양하기도 하다. 아들 녀석은 저마다 서로 다른 무늬를 띄고 있는 바위에게 일일이 이름을 지어주며 잘도 건넜다. 바위에서 바위로, 때론 물줄기를 사이에 두고 훌쩍 뛰어넘어, 때론 높은 바위로 밀어주고 잡아끌어주며 모처럼 다들 신이 났다. 디딜 곳 없는 큰 바위 위에 홀로 서있는 진달래의 유혹은 유난히 강렬했다. 어떻게든 그 바위 위에 올라서고 싶도록 모험심을 자극다. 서로 받쳐주고 밀어주고 잡아주고 올려주고….

계곡을 오른 지 얼마나 되었을까? 시계를 보니 출발한 지 3시간 반이 훌쩍 지났고, 걸어온 길은 자그마치 7킬로미터나 되었다.


 지금 내 오른손엔 두 개의 아름다운 흉터가 봄날의 추억으로 남아있다. 큰 소를 끼고 있는 바위를 일부러 골라 건너려고 하던 중이었다. 한 손으로 바위를 잡고 한 손으론 바위 위의 남편에게 아이를 넘겨주려다가 그만 균형을 잃고 말았다. 순간적으로 아이를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보니 손등이 완전히 바위에 짓눌렸다. 다행히 아이는 물에 살짝 발만 적시고 내 오른손등은 완전히 뭉개져버렸다.


 손등 위의 흉터를 바라보며 생각한다.

해마다 어김없이 봄은 또 올 테지만 우리가 함께 누린  봄은 아니라는 것을. 

남편말대로, 일생에 단 한 번 뿐인 그 해 봄날의 유희에 기꺼이 동참한 일은 암만 생각해도 탁월한 선택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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