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작고 낡은 신혼집은 한지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전통적인 분위기로 가득했다. 한지를 바른 벽과 한지등 그리고 한지공예소품과 고가구를 이용한 집꾸밈이었다. 얇은 한지 고문서를 유리창에 바른 후 원하는 문양을 파내어 엷은 색한지를 덧댄 유리창은 햇살이 비치면 은은한 빛을 띠며 운치를 더했다. 그 당시 우리 부부는 한지의 실용성이나 기능적인 측면보다는 한지가 자아내는 은은한 아름다움과 고풍스러운 매력에 푹 빠져있었다. 운치 있는 삶을 즐길 줄 알았던 옛사람들의 풍류와 낭만에 대한 동경심이 깊었던 것이다. 시내에 있는 공예연구실까지 다니며 한지공예를 배우기 시작하였는데 첫아이 만삭이 되었을 때까지도 손에서 놓지 않았던 것을 생각해 보면 어지간히 좋아했었나 보다.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더 넓은 아파트로 이사한 후에는 바빠진 일상생활에 편리한 기능을 우선시하느라, 그때만큼 삶의 운치를 누리며 살지 못했다. 전통문화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 지냈던 신혼집의 추억은 지금도 문득문득 그리운 풍경 중 하나로 남아 있다.
한지가 있는 풍경 2
유년시절, 고향집에서는 겨울이 오기 전, 온 집안의 문짝을 떼어 내 새로 창호지를 바르곤 했었다. 눈부시게 환한 새 창호지문의 산뜻한 변신은 겨울을 맞는 기분 좋은 풍경 중의 하나였다.
볕 좋은 가을날,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집안의 문짝들을 모두 떼어서 뜰방에 가득 세워 놓았다. 부엌에서는 할머니와 엄마가 풀을 끓이고 도구들을 챙기느라 분주하였다. 그동안 우리 형제들은 세워 둔 문짝에 신나게 물을 뿌려대며 불려진 묵은 창호지를 말끔히 떼어 내었다. 이런 날 우리 집은 오랜만에 잔치가 돌아온 듯 떠들썩하니 웃음꽃이 만발했다. 깨끗하게 떼어 낸 문짝에 새 창호지를 바르고 난 후에는, 마르는 사이사이 살짝살짝 물을 뿌려주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팽팽하게 잘 마른 창호지문을 바라보는 일은, 우리들에겐 최고의 짜릿한 볼거리였다. 살짝 손을 대어볼 때 느껴지던 팽팽한 긴장감. 손가락으로 '톡'하고 건드려보면 '통'하고 화답하는 소리는 찬란하게 부서지는 가을햇살만큼이나 경쾌했다.
그런 날 밤, 달이라도 솟아오르면 새창호문에 어린 달빛에 깜짝 놀라 깨곤 하였다. 잠결에 어리둥절한 채로 바라보던 방안의 풍경은 고요하게 일렁이는 달빛에 잠겨 매우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한지가 있는 풍경 3
가을 햇살, 달빛, 대숲, 눈 온 아침, 그리움, 고요, 찻잔에 어린 연둣빛 찻물, 벽에 세워진 거문고, 고운 편지, 어머니의 오래된 바느질 상자, 꼬깃꼬깃 펼쳐지던 할머니의 사탕봉지, 사랑방에서 들려오는 낭랑한 글 읽는 소리는 한지를 떠올리면 함께 생각나는 것들이다. 모두 고즈넉하고 따뜻하고 운치 있다.
조금 꼬깃꼬깃하더라도 한지에 싸서 보내준 선물은 마냥 고맙다. 그걸 매만진 사람의 손길과 정성이 그대로 전해지기 때문이다.
많은 말이 아니어도 한지에 꼭꼭 눌러쓴 몇 자 안 되는 편지는 마음을 글썽이게 한다. 다른 편지지 다 놔두고 굳이 골라 쓴 한지에서 상대방의 진실하고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우연히 들러본 문구점에서 한지로 만들어진 수첩이나 노트를 만나면 그만 걸음을 멈추어 만지작거리고야 만다. 왠지 그 노트를 펼치면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풀어놓아도 좋을 것 같은 용기가 생기기 때문이다.
한지로 만든 생활용품들을 보면 한없이 행복해진다. 그 안에 제일 귀하게 여기는 것들을 담아 놓고 한 번씩 꺼내보는 상상만 해봐도 저절로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이다.
사람, 사물 할 것 없이 한지와 어우러진 것이라면 모두 곱고 귀하게 여겨지는 까닭은 내 안의 속 뜰을 좀 더 은은하며 고아한 정취로 물들이고 싶은 내면의 욕구가 있기 때문일까? 요란한 세상, 당신에게선 한지의 은은한 아취가 느껴져!'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인생을 잘 살았다는 생각에 더없이 행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