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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컬쳐커넥터 김도희 Mar 16. 2024

극 P와 극 J의 원룸 공생법

전쟁보다 사랑을 위하여

예민해지기 쉬운 타지 생활에서 개인 공간도 없이 원룸에서 부부가 함께 사는 일... 내게 닥칠 일이라 생각을 못했다.


극 P와 극 J의 공생

남편과 연애를 시작하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서로에 대한 호감과 타오르는 애정으로 카톡 창이 쉴 새 없이 울려도 모자랄 판에, 남편의 답톡은 내가 카톡을 보낸 지 최소 1시간이 지나서야 오곤 했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뭐야, 이 남자 나에게 관심이 있긴 한 건가?'


몇 번의 데이트를 하며 남편을 조금 더 알게 되고 나서야 한국인만큼 실시간으로 메시지 답장을 하는 민족도 없으며 (역 우리는 무엇이든 빨리빨리다), 무엇보다 남편의 삶의 속도는 나보다 훨씬 느리게 흘러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남편에겐 개인적인 공간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도 배웠다. 물리적인 공간 외에도 시간적 공간 말이다. 그가 심지어 2시간 넘어 답장을 해도 나는 개의치 않게 되는 인내심도 길렀다. 그 사이 내 스스로 할 일에 집중할 수 있는 힘도 조금 길렀다.


남편에게 혼자만의 시간과 개인적인 공간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기에 대만으로 이주를 결정하고 나서 가장 걱정됐던 것은 바로 집이다. 너무나도 높은 대만 집값에 우리 예산 내에서는 원룸이 최선이었으니, 6개월 간 코딱지만한 공간에서 보이지 않는 각자의 영역을 존중해 주며, 서로 부딪히지 않고 잘 사는 것이 관건이었다.

책상도, 침대도, 화장실도, 옷장도, 의자도 모두 한 개씩 구비된 1인 가구 원룸에서 말이다.


남편과 데면하기로 했다


남편은 집을 구하기 위해 나보다 일찍 출국했다. 내가 대만 집에 도착하자마자 남편은 우리의 작은 러브하우스를 구경시켜 주며, 나를 위해 남겨 놓은 집안 곳곳의 공간들을 알려주었다.


"이 서랍장 젤 윗부분 두 칸만 내가 쓸게. 나머지는 도희가 써"

"화장실 벽 쪽 수건걸이는 내 수건을 걸게. 저쪽은 도희가 쓰면 어때?"

"책상은 1개밖에 없는데, 대부분 나는 도서관에 가니까 책상과 의자는 도희에게 줄게!"

"도희도 물건을 항상 똑같은 위치에 두는 습관을 들이면 어때? 이건 여기 항상 둘게. 그러면 뭘 찾을 때 수월하게 찾을 수 있을 거야"


극 P와 덤벙대는 성향의 나와 달리, 극 J 성향의 남편은 늘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을 실천하고 회고하며, 자기 생 잘 관리하는 편이다. 물건을 둘 때도 항상 계획적으로 정리하며, 사소한 일과도 메모에 적어 언제 할지 정한다. 대신, 예상치 못한 어떤 일이 발생할 경우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편이다.


반면, 나는 사실 정리를 잘하지 못한다. 또 머릿속에 떠오르는 일은 지금 해야 하고 아이디어가 샘솟으면 그 순간  일에 착수하는 즉흥적인 성격이다. 그러다 보니, 루틴을 지키는 일이 나에겐 정말 어렵다. 하지만 유연한 성격에 삶에 일어나는 변화들을 즐기는 편이다.


달라도 너무 다른 우리 두 사람이 6개월 간 원룸 생활을 잘 해낼 수 있을까? 내가 남편에게만 맞추는 건 괜히 내가 지는 것 같, 남편도 나에게 맞춰줄 수 있지 않나?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올 때, 과연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이 이성적으로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 그리고 나는 정리 잘하고 조직적인 남편의 습관에 편승하기로 했다.


보이지 않는 국경

좁은 집에 우리는 보이지 않지만 각자의 나라를 의미하는 국경을 만들었다. 남편 나에게 하나뿐인 책상을 준다고 했지만, 나는 나보다 덩치 큰 남편에게 양보했다. 대신 베드테이블을 내 책상으로 쓰기로 했다. 나에게 딱 맞는 사이즈였다. 각자 집에서 할 일을 할 땐 서로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말을 걸지도, 소리를 내지 않는다. 화장실 문을 열때도 조심히 연다. 노트북이나 휴대폰으로 무언갈 볼 때는 반드시 이어폰을 쓴다. 자의 하루 계획을 공유하고, 그 시간을 온전히 존중한다. 대신 밥을 먹거나 주말에 놀러 갈 때는 함께하는 시간을 200% 즐긴다.


부부끼리 뭘 이렇게 피곤하게 생활하나 싶기도 하겠지만, 서로 간의 적당한 거리는 부부 관계를 더 가깝고 돈독하게 만들어 준다. 코딱지만 한 원룸에서 전쟁보다 사랑을 키워나가는 덴 역설적이게도 서로 간 거리를 두는 일이다. 연애와 결혼 초기 나는 내 성향대로 의사 결정을 하지 않는 남편에게 좌절하기도 하고 짜증을 내기도 했지만, 이제는 이 다름이 각자의 부족함을 보완해 준다는 걸 받아들이게 되었다. 자의 성향에 유연함을 조금 보태면 우리는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다.


남편은 일요일에 한 주의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내가 자신에게 부탁하거나, 우리가 논의할 일이나 본인이 할 일이 있으면 미리 알려달라고 부탁한다. 이 일정이 내게는 나와 우리 가정의 계획을 세워야 하는 데드라인과 같다. 처음에는 이 사이클을 따라가는 게 힘들기도 했지만, 덕분에 조금은 사소한 루틴을 지키는 힘을 기르고 있다. 고 남편 역시 나와 맞춰가는 법을 배우고 있다.


"J, 이건 이번 주 계획엔 없지만 혹시 이번 주가 지나기 전까지 할 수 있을까?"


계획에 없던 일이 갑작스레 생기면 한숨을 푹 내쉬던 그도 이제는 이렇게 대답해 준다.


"잠시만 내가 이번 주 내에 언제 할 수 있는지 지금 확인해 볼게. 이번 주에 못하면 다음 주에 우선순위로 할게"


작은 원룸 안에서 평화롭게 공존하는 법, 서로 간의 적당한 거리와 유연함을 잘 지키다 보면 이 작은 원룸은 전보다 사랑으로 가득 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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