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컬쳐커넥터 김도희 Mar 19. 2024

나 홀로 위기의 주부

대만 생활 2주 차 위기가 닥쳤다.

위기의 주부_ 생활 편

대만살이 약 2주 차 벌써 위기가 찾아왔다. 새로운 환경에서 살림을 차리다 보니 하나부터 열 가지 신경 써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어떤 물건을 어디서 사야 하는지도 알아내는 것도 숙제이지만, 가격 체계가 달라 물건을 하나 살 때도 물건 가격이 대략 한화로 얼마인지 가늠하기 위해 계산기를 두드려봐야 한다. 더군다나 즐비한 식당과 가게에 장을 볼 때도 밥을 먹을 때도 내가 합리적인 소비를 하고 있는 건지, 어느 집이 더 싼 지 아직까지 시장 상황을 파악하고 있다. 주머니 가벼운 학생 신분인 남편과 내겐 한 푼이 아쉬운데...


게다가 모두 대만 중국어로 쓰여있으니, 중국어 까막눈인 내겐 AI 번역앱인 파파고느님이 필수다. 물건을 살 때, 음식을 주문할 때나 서류를 처리해야 할 땐 복잡한 한자를 한 자 한 자 쓰지 않으도 번역이 필요한 것을 사진 찍으면 한국어나 영어로 번역해 준다. 하지만 문화와 맥락의 총체인 인간의 언어를 정확히 알려주는 건 파파고느님의 힘에 부치는 것 같다.


나의 절친 파파고..그치만 이해 못했어.

언어 장벽과 다른 생활환경에 부딪히다 보니 일상의 사소한 모든 것을 처리하는 데 평소보다 2~3배의 시간이 걸린다. 매일 맞닥뜨리는 상황에 남편 따라 어쩌다 대만에 온 나는 위기의 주부가 돼버렸다. 아직 2주도 안 됐는데 오늘 처음 이런 상황에 불쑥 짜증이 올라왔다. 스웨덴에 유학 갔을 때도 언어, 문화, 시스템이 모두 다 달라서  첫 달은 좌절로 가득 찼는데, 2주가 더 지나면 조금은 더 나아질까?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해외 생활이 쉽지만은 않다. 아직 5개월 넘게 남았는데..


일상의 좌절이 쌓이니 사람이 예민해지는 걸까. 남편과의 커뮤니케이션에도 오늘 처음으로 빨간 등이 켜졌다. 약 4년을 만나는 동안 우린 싸운 적이 없는데, 최근에는 사소한 의사 결정을 둘러싸고 입장차를 보인다. 둘 다 악다구니는 못쓰는 사람들이라 싸우지는 않지만 서로 서운해지는 시간이 많은 것 같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입을 꾹 닫게 된다. 서운한 건 혹시 나만 그런 걸까? 인간 관계사는 1인칭 시점이니까.



위기의 주부_ 남편과 빨간 불

한국에서는 한국인으로서 내가 행정 처리는 주로 맡아서 하고, 남편은 토픽 6급에 빛나는 한국어 실력과 한국살이 10년 내공 덕분에 힘든 점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둘 다 이방인인 대만에 오니 사정이 너무나 다르다. 우리 둘 다 이곳 사정에 밝지 못하니까 모든 게 다 어렵고, 시간이 많이 걸리고, 실수를 하고, 똑같은 일을 반복해 몇 번이고 해야 한다. 더군다나 가사와 행정 처리 등을 함께 분담해야 하는데 낯선 이곳에서 누구 하나 이끌기가 어렵다. 사 결정을 하나 하는 데도 입장 차가 생긴다. 더군다나 지침에 예민함까지 겹쳐, 소통할 때 부정적인 감정도 서로 모르게 비친다.


1인청 시점에서 나는...


'남편 공부를 위해 이곳에 왔으니, 시간 많은 내가 가사를 더 분담야겠다'


'교민 온라인 커뮤니티도 잘 되어 있으니 내가 다 물어보고 해결하지 뭐'


조의 여왕 같은 아량으로 내가 뭐든 해보긴 했는데... 뭔가 나만 더 많이 일을 하는 것 같고 남편은 조금 무관심한 것 같은 마음에 괜히 속상해진다. 또 별거 아닌 것에 서로 예민해지는 것 같아 울컥. 처음으로 눈물이 나왔다. 그의 입장도 있겠으나 서운한 건 어떡하나...

나의 절친 도서관

대만에서의 위기의 주부. 딱히 친구도, 같이 공부하는 사람도 없는 곳에서 순간 외로움이 몰려왔다. 처음으로. 낯선 해외 생활이지만 잘 헤쳐나갈 수 있고, 남편도 있으니 두 배는 더 강하다 생각했는데. 믿었던 기둥과 거리를 두게 되니 너무 외로워졌다. 저녁을 먹고 좁은 집에서 나와 주변을 산책했다. 비행기로 2시간 30분이면 갈 수 있지만, 당장은 달려갈 수 없는 한국에 있는 절친들이 보고 싶었다. 노란색 카카오톡 메시지 창을 띄웠다.


카톡. "다들, 잘 지내니? 퇴근했어?"


안부를 묻는(속내는 이야기 상대가 필요했던) 내 카톡에 이제 막 퇴근한 친구가 고맙게도 대나무 숲이 되어 준다. 속사포로 카톡창에 답답한 마음을 토로하고 나니, 그나마 속이 좀 시원하다. 퇴근 후 피곤할 텐데도 가만히 내 이야기를 들어준 친구에게 너무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산책을 끝내고 조금은 덜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에 돌아왔다.


아직은 남편과 나 사이에 어색한 공기가 흐른다. 고맙게도 그가 인사와 포옹을 건넸다. 하지만 나는 남편을 어색하게 안고나서 침묵하고 있다. 좁쌀 같은 마음에 아직 서운한 감정이 남아 있는 건지. 남편도 나랑 타지에서 살면서 분명 힘든 점이 많을 텐데..... 이해가 가면서도 오늘은 그냥 내 감정에 집중하고 싶다.


오늘 대만엔 비가 왔다.

하지만 우리는 다시금 내일 아침을 맞이하겠지.

내일은 해가 쨍하고 뜨면 좋겠다. 밝은 햇살 아래 남편이 낯선 이곳에서 그의 삶을 충실히 살아내려 노력하는 것만큼, 나도 내 삶을 충실히 살아낼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멀어졌던 만큼 다시 서로에게 다가갈 것이라 믿으며, 오늘은 위기를 성숙해지는 고요와 고독으로 승화시켜야겠다.



바로 몇일 전...저는 공생법에 대해 글을 썼는데 말이지요.. 사람 마음이 이렇게나 빨리 바뀌는게 참 무섭기도 합니다. 러분의 관계는 안녕하셨나요?



이전 04화 극 P와 극 J의 원룸 공생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