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생 많으셨습니다.
1. 딸 귀한 집의 공주님과 비디오 가게의 꿈
아빠는 7남매 중 다섯째였고, 우리 집안은 유난히 딸이 귀했다. 큰집 막내 언니를 제외하면 내가 유일한 딸이었기에, 오빠들은 나를 늘 공주 대접해 주었다. 제사가 끝나면 여자들은 마루에서 따로 상을 받았지만, 나는 당당히 안방에서 아버지, 오빠들과 함께 밥을 먹던 유독 사랑받던 아이였다.
방학이면 둘째 큰집에 가서 오빠들과 공포영화를 빌려 보는 게 인생의 가장 큰 낙이었다. 불을 끄고 숨죽여 ‘나이트 메어’를 볼 때면, 장난기 가득한 큰아버지는 어김없이 나타나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곤 하셨다.
큰엄마를 동네 여자친구 괴롭히듯 끊임없이 장난치며 애정을 표현하던 큰아버지. 어린 내 눈에 비친 큰아버지는 세상에 둘도 없는 '테토 남(진짜 상남자셨다.)'이자 사랑꾼이었다. 그 모습이 너무 좋아 나는 큰엄마에게 호기롭게 약속하곤 했다.
"큰엄마, 나중에 내가 3층 빌딩 지어서 1층엔 비디오 가게 하고, 3층에 큰아빠랑 다 같이 살게 해 줄게요!"
2. 가장 힘들 때 지팡이가 되어준 가족
시간이 흘러 내가 이혼이라는 아픔을 겪고 돌아왔을 때, 나보다 더 분해하며 "왜 혼자 그 고생을 했느냐"라고 내 편이 되어준 것도 큰집 식구들이었다. 홀로서기를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내게 그분들은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아, 나에게도 나를 걱정해 주는 가족이 있었지'라는 사실을 일깨워 준 고마운 존재들.
우리 엄마가 투병 중일 때, 큰아버지는 "제수씨, 그동안 고생 많았어"라며 순금 쌍가락지를 건네셨다. 동생에게 반지 하나 제대로 못 받아본 제수씨가 안쓰러웠다며 마음을 쓰시던 그 따뜻한 손길에 엄마는 펑펑 울음을 터뜨리셨다.
3. 아빠가 형님을 마중 나온 꿈
세월은 야속하게 흘러 제사는 사라지고, 장난꾸러기 큰아버지는 치매라는 불청객을 맞이하셨다. 새해엔 꼭 전화라도 드려야지 마음먹고 있었는데, 새벽에 날아온 사촌 오빠의 한 줄 부고 소식.
이상하게도 전날 밤 꿈에 아빠와 엄마가 나란히 보이셨다. 아빠 기일이라 찾아오신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먼 길 떠나는 형님을 마중 나오셨던 모양이다. 서둘러 달려간 장례식장, 입관실에서 마주한 큰아버지는 그저 평온하게 눈을 감고 계셨다.
늘 큰아버지의 애정 공세에 퉁명스럽게 대꾸하시던 큰엄마가 고인의 얼굴을 감싸 쥐고 말씀하셨다.
"늘 사랑한다고 했지? 나도 많이 사랑했어. 고생 많았어요."
그 고백에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아마 큰아버지는 그곳에서 그 소리를 듣고 아이처럼 좋아하고 계시리라.
4. 이제는 내가 어른이 되어가는 길
나를 지탱해 주던 어른들이 하나둘 떠나고, 이제는 내가 누군가를 지탱해 주어야 할 어른의 위치에 서 있다. 큰아버지를 보내드리며 다짐한다. 내 곁의 사람들에게 더 충실하고, 더 뜨겁게 사랑하며 살겠노라고.
(마지막 가는길에 사랑했노라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보겠습니다.)
큰아빠, 84년의 긴 여정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제 아픔 없는 곳에서 엄마, 아빠와 반갑게 재회하세요. 그리고 가끔 제 꿈에도 들러 장난기 어린 그 웃음 보여주세요.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