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어느 초가을,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어느 새벽에 일어났던 일이다. 창으로 들여다보는 남자가 나타나던 집에서 교회 옆 단독 주택 일 층으로 이사 오고 나서 나는 가위에는 눌리지 않았다. 하지만, 내 기억엔 이날 이후로 가끔 예지몽이라고 할까? 미리 예견할 일을 알아서 화(禍)를 피하거나, 희(喜)를 더욱 즐겁게 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왠지 ‘조심해야 할 것 같다!’ 또는 주변인들에게는 ‘전화라도 넣어봐야겠다!’ 하는 정도는 알 수 있게 된 것 같다.
그림을 그리는 아빠의 화실 겸 안방에서는 아빠, 엄마와 동생이 잠을 자고 나는 안방과 주방을 연결하는 중간 방에서 혼자 잠을 자고 있었다. 분명 자정이 넘어 잠이 들었고,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내가 잘 때 머리를 둔 방향의 유리로 된 미닫이 문안으로 한 낮 같은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너무 졸렸지만 강한 빛에 눈을 찌푸리며 일어나 앉았다. 아빠도 그 빛을 보았는지 방문을 열고 나왔고, 놀란 나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빛 안에서는 환하게 웃는 여인이 우리 부녀를 바라보며 방 안으로 들어왔고, 빛이 조금 익숙해지자 그 얼굴이 큰엄마의 얼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큰 엄마! 갑자기 우리 집엔 어쩐 일이에요?”
큰 엄마는 아무 말도 없이 계속 웃는 얼굴로 나와 아빠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내 손을 잡더니, 계속 미소를 띠고 있었다.
“JINI야! 네 아빠 잘 챙겨드려.”
“응?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내 기억 속 큰 엄마는 츤데레 같은 분이셨다.
아빠는 사남삼녀 중 다섯째였고, 어려서부터 몸이 약해서 농사일도 못 돕고 집에서 공부하고 그림만 그리셨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큰 형이 서울에 올라와 중국집에서 양파를 까면서 일을 배우며 돈을 벌 때도, 형수와 조카들이 있는 방 한 칸에 얹혀 사셨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아빠는 할머니보다 형수에게 더 정이 있었던 것 같다. 아빠네 형제들은 시골에서 올라와 한집에 같이 살아서 그런지 서로 정이 많은 것 같았다.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제사가 있고, 그때마다 꼭 하루 전날 모여 같이 음식을 만들며 제사 준비 했다. 사형제 중 아버지는 셋째고 동생이 있었지만, 작은 아빠가 먼저 결혼을 하셔서 내 동생과 작은 아빠 둘째를(걔들 둘도 아들) 제외하고는 전부 오빠들이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큰 집 만 가면 이쁨을 독차지했다.
지금은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남자들이 밥을 먹고 나서 며느리들과 여자들이 뒤에 따로 식사했지만, 나는 오빠들과 한 상에서 밥을 먹어도 아무도 뭐라는 사람이 없었다. 게다가 오빠들이 제사상에 한과나 약과에 손을 대면 벼락같이 혼을 내시던 큰엄마는 오빠들이 나가 놀면 몰래 나를 불러서 다락에 식구들이 집에 갈 때 싸 주려고 올려놓은 음식 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약과를 비닐에 담아서 몰래 주시면서 “혼자 먹어!”라며 늘 챙겨주시곤 하셨다. 사실 그땐 내가 이뻐서 그러신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보다는(큰 엄마께서 아빠랑 정도 있지만) 우리 엄마가 “형님~형님~”하며 잘 따르고, 항상 먼저 챙기면서 없는 살림에도 제사 끝나면 다른 동서들 모르게 꼭 얼마라도 챙겨드리고, 명절 때 부모님께 선물하듯 꼬박꼬박 선물도 챙기고 했던 모습이 예뻤던 게 아닐까? 결국, 큰 엄마의 우리 부모님에 대한 애정이 나에게까지 내려온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랬던 큰 집에 언제부터인지 제사가 줄고, 명절 때나 겨우 만났던 것 같았는데, 설에 뵙고 추석에나 만날 줄 알았던 큰 엄마가 우리 집으로, 그것도 우리가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이른 시간에 오신 것이었다.
“큰 엄마, 혼자 왔어요? 오빠들은?”
큰 엄마는 자상한 얼굴로 아빠와 나를 한 번 더 바라보더니, 아빠와 내 손에 황금색으로 동글동글하게 말아놓아서 마치 청심환이나 페레로*쉐 초콜릿 모양같이 생긴 무엇인가를 올려놓으셨다. 아빠는 그게 뭔지 묻지도 않고 단번에 삼켰고, 명치쯤에 그게 딱 걸렸는데, 답답해하며 가슴을 쳤고, 나는 아빠 등을 두드리면서 그걸 왜 씹지도 않고 삼키냐고 아빠를 나무랐다. 그 모습을 보시던 큰 엄마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빠를 보시고, 나에게 다시 한번 당부를 하셨다.
“아빠, 잘 챙겨야 한다.”
그러더니, 빛과 함께 점점 작아지며 사라지셨다. 나는 꿈에서 벌떡 깨서 깜깜한 유리문을 바라보며 울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사실 나는 그때 큰엄마가 아프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도 큰 엄마에게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난 걸 알 수 있었다. 이때, 안방 전화벨이 울렸다.
“따르르릉~”
나는 안방문을 열고, 전화기를 쳐다보며 울었다. 엄마는 전화벨 소리에 일어나서 방문 앞에 서서 울고 있는 나를 보고 먼저 흠칫 놀라더니 혼자 말로 욕을(우리 엄마는 욕쟁이다.^^;)하고 받으셨다. 심각한 표정으로 엄마가 말했다.
"그래, 바로 갈게"
“이 시간에 누구야?”
전화를 받는 엄마에게 아빠가 물으셨다. 나도 물었다.
“큰 엄마야?”
심각한 표정으로 전화를 끊은 엄마는 아빠에게 빨리 일어나서 큰 집에 갈 준비를 하라고 했다.
“이 새벽에 무슨 일인데?”
“형님이 지금 막 돌아가셨대, 빨리 준비해!”
“형수님이?”
아빠는 번개같이 일어나서 옷을 입으셨다. 나도 같이 가려고 옷을 입으려는데, 엄마가 말했다.
“너는 동생이랑 집에 있어! 아침 되면 일어나서 옷이랑 챙겨 입고 학교 다녀오고, 막내 이모한테 저녁에 오라고 할게”
“나도 갈래!”
“안 돼! 학교 결석하면 안 돼!”
엄마는 절대 결석은 허락하지 않는 분이셨다. 내가 먹을 걸 다 토해내고 픽픽 쓰러져도 업어서 학교에 데려다 앉혀놓고, 수업 끝나는 시간에 맞춰 오시는 분이었으니, 학교를 빠지면 하늘이 무너진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조부모나 친부모가 아니니 당연히 출석 인정은 안 될 테고, 엄마는 절대 우릴 데려갈 생각은 없는 듯했다. 게다가 3학년이던 남동생은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어서 깨워도 정신을 차릴 것 같지도 않았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아빠와 엄마를 보내고, 동생 옆에서 다시 잠이 들었다.
그로부터 32년 뒤, 귀신과 함께 이사한 그 지하 방에서 있었던 일이다. 술 한잔하고 거실에서 그대로 쓰러져 자는데, 내 볼 위로 축축한 뭔가가 스치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곧 물방울이 똑똑 내 얼굴로 떨어졌다. 나는 내 얼굴의 물기가 내가 흘린 침인 줄 알고 얼굴을 쓱 닦으며 일어났다. 이때, 내 얼굴 바로 위, 퉁퉁 부은 하얀 얼굴에 파란 입술을 덜덜 떨며, 한 여인이 서서 나를 내려보고 있었다. 놀라 뒤로 물러나 앉으며 그 형체를 자세히 보았다. 흰색보다는 분홍에 가까워 보이지만, 진흙과 물에 젖어 축 달라붙은 한복에 온몸에서 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너무 춥다. 너무 추워”
“크···, 큰 엄마?”
돌아가시던 날 꿈에 나온 후로 명절이나 생일 전에 잠깐 보이는 게 다였고, 중학교 올라가서부턴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도, 내가 이혼해서 사경을 헤맬 때도 한 번을 안 보이던 큰 엄마가 이렇게 느닷없이 나타나시다니···. 그것도 이렇게 무서운 모습을 하고 나타나서 입술을 바들바들 떨며 춥다고 하신다는 것은 지금 좋은 곳에서 잘 지내고 계신 게 아니라는 게 아니겠는가!
나는 말문이 막혀 한참을 큰 엄마를 쳐다보았다. 큰 엄마는 퉁퉁 불어 터진 손을 명치께 가슴 올리더니 손바닥을 가슴에 대고 소화가 안 되는 사람처럼 원을 그리며 문지르셨다. 그런 중에도 계속 큰 엄마의 팔꿈치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 모습을 보며 그간 우리 집 안의 불행한 일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잠실 아파트를 빼앗긴 일, 20대 초반 울 엄마가 돌아가신 것, 또 큰 집이며 작은 집까지 내가 다 얘기할 수 없지만, 각종 사건 사고들로 가족을 잃는 등 집 안에 연이어 좋지 않은 일들이 일어났다. 분명 무슨 일이 있다 싶었다. 그리고, 며칠인가 지나 아빠에게 전화가 왔다.
“할머니, 할아버지 산소와 큰 엄마의 산소를 없애고 화장해서 뿌리기로 했다. 이번 주말에 가기로 했는데, 같이 갈래?”
뭐,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아빠는 운전면허가 없으시니, 내가 차로 모시고 다녀와야 했으니까 결국 같이 가자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다.
산소에 도착한 날은 하늘이 끄물끄물 곧 뭔가 내릴 것 같았다. 서둘러 파묘를 하기 위해 인부들과 아빠 형제분들 그리고 큰, 작은 엄마들과 사촌 오빠들이 산소로 올라가셨다. 나는 왠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차에서 대기하고 있겠다고 했다. 한참을 지나 아빠와 큰 엄마들이 혀를 내두르며 내려오셨다.
“너 안 올라오길 잘했다. 큰 엄마가 그대로야! 속상해서 혼났다.”
“그대로라니?”
“그 자리가 물이 차는 자리 더라고···, 관이 물에 잠겨서 큰 엄마도 입관할 때 그대로 하나도 안 썩었어!”
뒤로 작은 큰 엄마가 우셨는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내려오셨고, 할아버지 할머니는 뼈를 유골함에 담아 이동하고, 큰어머니는 나중에 관에 다시 모셔야 할 것 같다고 해서 뒤에 작은 오빠가 따로 다시 가서 했다고 기억한다.(사실 내가 워낙 혼을 잘 타니까 묘 근처에 가고 싶지 않았던 데다가 큰엄마가 그렇게 계셨다는데 충격을 받아서 뒤에 어떻게 하고 왔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뒤로 3년 뒤에 우리 아빠는 식도암으로 수술하셨다. 명치에 동그란 암 덩어리가 식도를 꽉 막고 자라서 음식을 역류시켜서 식도 절제를 하고 폐로 전이된 암을 치료하시던 중 코로나 예방접종을 하시고, 폐가 돌처럼 굳어 숨을 못 쉬고 돌아가셨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겠지만, 큰 엄마가 돌아가시면서 동그란 뭔가를 주었던 게 아빠의 병에 대한 어떤 암시는 아니었을까? 그리고, 엄마가 곁에서 지키지 못하니 내가 아빠를 살펴야 한다는 얘길 하신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된다. 또, 물에 젖은 한 복을 입고 춥다고 하신 큰 엄마의 꿈은 우리 집에 영혼들이 드나드는 어떤 문 같은 게 열려서 그간 아무에게도 전 할 수 없었던 큰 엄마 묏자리를 좀 봐 달라고, 나를 찾아오셨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아빠도 엄마도, 큰 아버지도 안 계시고, 집 안에 제사도 명절에 모임도 없다. 가끔은 답십리 오래된 단독 주택에 아빠의 형제분들과 큰 엄마들이 하는 얘길 들으며, 오빠들에게 같이 놀아달라고 쫓아다니던 그 시절이 너무 그립다. 이다음에 돈 많이 벌면 5층짜리 건물을 지어서 큰 엄마들에게 한 층씩 주고, 같이 살고 싶다고 했던 그 어린 시절과 그때 같이 계시던 내 하늘 같은 가족들은 이젠 어디서도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그저 더듬어 기억해야 하는 추억으로만 남았다는 게 많이 슬프고 허전할 뿐이다.
큰 엄마께서 그때 내게도 그 동그란 약을 주셨는데, 조심하라고 주신 거겠지? 늘 식도염, 위염, 위궤양을 달고 사는 내 모습을 보면 분명 조심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은 든다.
표 레지나! 보고 싶은 큰 엄마!
우리 엄마랑 아빠 만나셨어요? 아빠가 많이 반가워하셨을 텐데...
이젠, 좋은 곳에서 우리 집안 식구들 행복하게 잘 살 수 있게 기도 많이 해 주세요.
먼 훗날 만나요. 그때까지 안녕!
작가의 말
언제나 곁에서 하늘같이 나를 지켜주시던 어른들이 하나둘씩 자기 자리를 내려놓고 떠나십니다.
이젠 세상에 홀로 남겨진 고아 같다는 생각도 들고, 가끔은 타임머신을 타고 어린 시절로 돌아가 보고 싶은 분들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간의 설움을 다 토하듯 그분들 앞에서 실컷 울고 싶다는 생각도 하고요.
제가 꿈을 잘 꾸었을 때, 보고 싶은 가족들이 꿈에 나오면 깨고 싶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이 현실 세상에서 나는 또 누군가에겐 하늘 같은, 늘 곁에 있는 어른이 아니겠습니까? 그 마음, 믿음, 사람을 지켜주기 위해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내려고 노력했으니, 앞으로도 건강하게 오래오래 잘 살려고 노력하겠습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