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으로 그린 도화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게 당연한 게 아니란 걸
우리 집 마당은
나에게 마술 같은 공간이었다.
아주 큰 도화지가 되어
그리고 싶은 모든 것을 마음껏 그릴 수 있었다.
24색 크레파스를 쓸 수 있는 새하얀 도화지는 아니었지만,
나뭇가지만 있으면 세상에서 하나뿐인
나만의 도화지가 되었다.
마당 한 구석에는
단정하게 가꾼 화단은 아니었지만
내 소원을 이루어줄 봉숭아가 몇 그루 자라 있었다.
보라색, 주황색, 진분홍색 봉숭아꽃이 피면
고이 따 그것을 찧을 돌멩이를 찾아
엄마에게 소금을 조금 얻어
조심스레 빻았다.
그렇게 내 손톱 위에 올려
되도록 진하게 물이 들도록
몇 시간을 기다렸다 풀었다.
아주 진하게 물들어야
첫눈이 올 때까지 남아 있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당 가장자리에는
이름 모를 들꽃들이 피어 있었다.
그중 제일 예쁜 노란 꽃은
어버이날쯤이면 꼭 활짝 폈다.
지금도 그 이름은 모르지만,
노란 꽃을 볼 때마다
어버이날에 그 꽃을 꺾어
작은 꽃다발을 만들어 부모님께 드리던 기억이 난다.
(이름 모를 노란 꽃아, 매년 너희를 아프게 꺾어서 미안^^)
그리고 내가 제일 좋아했던
진달래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봄을 알리듯 잠시 피었다 지던 진달래였지만,
분홍빛이 연하지도 진하지도 않은 그 색이 참 좋았다.
수줍게 핀 진달래를 볼 때면
어린 마음에도 봄 냄새에 설레곤 했다.
흙으로 평평하게 넓었던 우리 집 마당은
그렇게 나에게
도화지가 되어주고
예쁜 꽃을 선물해 준
소중한 곳이었다.
그땐 그게 당연한 줄 알았는데,
지금은 안다.
세상엔
꽃 한 송이,
흙 한 줌도
당연한 게 없다는 것을.
그래서일까.
어쩌다 봉숭아 꽃잎을 마주할 때면
괜히 마음이 헛헛해지곤 한다.
작은 씨앗 하나에 그 여름의 소원이 맺혔다.
봄 냄새에 마음이 먼저 설레던 시절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