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어쩌다 윤작가 Apr 23. 2021

06_b와 d 구분도 못하는데 유학을 간다고?

무식하면 용감하다

캐나다로 떠날 때 딸아이는 영어를 한마디도 못했다. Nice to meet you 같이 외운, 판에 박힌 몇 마디 빼고는 영알못이었다. 어려서 이것저것 접할 기회는 주었었지만 그저 놀잇거리 중 하나일 뿐이었다. 유학을 결정하고 나서 겨우 한다는 게 학교 방과 후 영어 수업을 등록하는 것이었다. 알파벳이라도 익혀서 가자는 게 목적이었다. 출국 전에 겨우겨우 떼긴 했지만, 소문자는 어려워했고, 특히 b와 d는 배가 튀어나온 방향을 헷갈려했다. ㅎㅎ


그런 아이를 데리고 갈 생각을 하면서 사실 걱정이 많았다. 너무 어린 나이라 영어를 더 쉽게는 배우겠지만 돌아와서 더 쉽게 까먹을 것이라는 사실 때문에.. 들이는 돈에 비해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미 난 사고를 친 후였다. (물론 마지막 단계인 학비를 부치는 순간을 최대한 미루면서 고민에 고민을 했던 건 사실이다)


입학허가서와 부모 동반 확인서



또 하나의 걱정은 친정 부모님이었다. 내가 조기유학 때문에 회사를 그만두기 전까지 아이가 6개월일 때부터 데리고 살면서 키워주셨기 때문에 아이에 대한 그리움과 허전함이 너무나 크겠다 싶었다. 아빠는 손녀딸 없이 무슨 재미로 사나 하셨지만, 너무나 강하고 쿨한 우리 엄마. 일절 그런 내색을 안 하신다. “전화하면 되지” 이러신다.


그래서 출국하기 한 달 전쯤부터 나는 친정엄마에게 컴퓨터와 인터넷 사용법, 그리고 네이트온 화상채팅 사용법을 알려주기 시작했다. 요즘처럼 스마트폰이 있었으면 얼마나 편했겠나 싶다. 그때는 스마트폰이 막 나와 주변에 사용하는 사람이 거의 없던 시절이다. 나이가 칠순이 넘으셨어도 한 ‘똑똑’하시는 우리 오여사님은 역시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캐나다 있는 동안 거의 하루를 빠짐없이 우리는 같은 시간에 화상으로 만났다. 울 엄마 만세!!!


떠나기 전날, 씩씩하던 딸아이도 약간은 의기소침해 있던 기억이 난다. 가지 말까? 하니 가지 말잔다. 식구들, 친구들과 헤어지는 게 싫단다. 하지만 난 일단 우리 딸을 믿었다. 아이가 명랑 씩씩하고 적응을 잘하는 성격인지라 낯선 환경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잘 어울려서 영어도 잘 배우리라 믿었다. (물론 그건 적중했다 ㅎㅎ)  그런 성향의 아이가 아니었다면 조기유학의 꿈을 실현하지 못했을지 모른다.


캐나다 학교 첫날 /  학교 가는 숲길


캐나다행은 나 개인적으로도 참으로 만감이 교차하는 일이었다.

나는 학부와 석사과정에서 영어를 전공했고, 마흔이 넘도록 영어를 업으로 삼고 있었다. 영어를 그렇게 오래 접해 왔음에도 영어는 어려웠다. 내 언어가 되질 않았다. 그리고 영어권 나라에서 살아본 경험이 없다는 데서도 가끔 한계에 부딪혔었다. (한두 달 체류로 경험할 수 없는 그 이상의 것들 말이다.) 그래서 그 한을 어느 정도 해소하는 차원에서 설렘이 컸다.


내가 공부하고 아이를 동반으로 데려가는 것도 생각은 해보았으나, 아이가 어려서 보호자가 꼭 붙어 있어야 하는 그 나라의 법도 문제였고(정말 그 이유였을까? 움... 사실은 공부하기 싫었다는..), 무엇보다 아기 때부터 할머니 할아버지의 손에서 지낸 아이에게 짧게나마 엄마가 24시간 딱 붙어서 케어해주고 싶다는 생각도 컸다. 그래서 아침저녁 해먹이고 학교 있는 시간 빼고는 늘 붙어 있고, 어디든 데리고 다니면서 전업맘으로 지낸 그곳에서의 2년이 나도 너무나 행복했다. 귀국 후 다시 직장맘이 되어 혼자 있는 일이 잦은 딸에게 미안하고 안쓰러운 마음이 들 때마다 이렇게 생각하며 애써 마음을 달래곤 한다.


‘캐나다에서 2년간 엄마 노릇 잘했잖아.’

ㅎㅎㅎ 이거 평생 갈 것 같다.

이전 05화 05_설렘은 잠깐, 빡셈 가득 처음 3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