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한량체질 04화

머리카락 버리기

계절찬가

by 알담


긴 머리칼의 물기를 수건으로 대충 털고선 드라이기를 켠다. 십 년째 쓰고 있는 드라이기의 냉풍 기능은 식어빠진 미지근한 바람이 된 지 오래다. 미적지근한 온도만큼 바람도 약해서 결국 어쩔 수 없이 강풍으로 말리곤 한다. 여름날 뜨거운 바람을 머리에 정통으로 맞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두피가 대강 마르자 얼른 스위치를 끄고 한숨을 내쉰다. 곧바로 뒷목에 식은땀이 흐른다.

여름이다.

지금 내가 사는 집은 선풍기가 없다. 앞방에 사는 분이 한국에 돌아갈 짐을 정리하며 건넨 휴대용 선풍기 뿐. 나는 생각지 못한 그 선물을 아주 고마워했다. 발코니 창문을 힘주어 연다. 하늘은 언제나처럼 깨끗하다. 바람 하나 없지만 그래도 방 안보다는 낫다. 손가락을 넓게 벌려서 손갈퀴로 머리카락을 엉성하게 빗는다. 아직 덜 말라서 물방울이 맺힌 채 버석버석한 머리카락 한 줌이 빠진다. 나는 그걸 발코니 밖으로 던진다. 아니, 손에 엉겨붙는 그 실타래를 발코니 밖에 살포시 얹는다. 그건 곧장 아래로 떨어지지 않고 눈 앞에서 흐느적거렸다. 공기가 엉킨 머리카락을 하나씩 풀어헤쳤다. 그렇게 빙빙 돌다가 물에 휩쓸리듯 옆으로 천천히 흘러갔다. 나는 다시 머리를 빗는다. 두번째 머리카락을 공기 속으로 띄웠을 때, 아직 남아있는 햇빛이 머리카락을 투과해 붉은 갈색으로 만든다.

잔잔한 초저녁의 시간이다. 이상하리만큼 바람이 없다. 내가 들이마시는 공기가 머리카락과 뒤섞여 눈 앞에 떠있다. 반짝이는 붉은 실이 두둥실 떠오른다. 하늘로 사라지려는 듯이 그렇게 또 흘러버렸다. 나는 아까의 머리카락이 어디 갔나 싶어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익숙하지만 낯선 우리 동네. 나는 꼭대기층에 산다. 밤 아홉시가 넘었는데 하늘이 어둡지 않다. 그렇다고 낮처럼 밝지도 않고. 미적지근한 하늘을 멍하니 보다가 내 드라이기를 떠올린다. 방안에서 휴대용 선풍기를 가지고 나와 남은 머리를 말리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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