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기억에 없는 자기
한 남자가 안나를 찾아왔다. 머리카락이 가느다랗고 머리숱이 듬성듬성한 중년 사내였다.
자기일 줄 알았어. 인스타그램 광고 프로필 사진이 바로 자기였거든. 비슷한 사진이 많았지만 나는 바로 알아봤어. 자기 몸에서 풍기던 자기 느낌이 바로 전해져 왔거든.
그는 안나를 부둥켜안고 울었다. 그의 몸에서 식용유 냄새와 음식 냄새와 볶은 커피콩 냄새가 뒤섞여 뭉친 냄새가 났다.
자기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몰라. 자기 같은 애를 다시는 만날 수 없었거든.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어. 내가 욕심을 내서 벌 받았나 봐.
그는 다시 안나를 안고 울다가 이내 안나를 쓰다듬고 핥았다.
근데 자기가 어떻게 여기 있을 수 있지?
그는 갑자기 안나의 몸에서 제 몸을 빼내며 물었다.
모르겠어요. 나는 어느 소년의 집에서 버려졌다가 팔려온 것밖에 몰라요. 아저씨도 잘 모르구요. 기억에 없어요.
뭐, 기억에 없어? 나를 몰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안나에게 버럭버럭 화를 내던 그는 안나의 표정을 보고 제풀에 꺾였다.
이 새끼들 말야, 가만 안 놔둘 거야! 내 마누라를 팔아먹어? 기억을 지우고 팔아먹어?
그가 다시 벌떡 일어나 허공에 삿대질을 했다. 금방이라도 일을 낼 것 같았다.
근데 자기는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어떻게든 내게 연락을 했어야지? 찾아오라고, 와서 빼내 달라고 연락을 했어야지. 자기는 내 마누라 아냐?
나는 아저씨 모르는데요?
그는 안나의 말은 듣지도 않았다. 분노와 질투로 눈이 뒤집힌 것 같았다. 그는 다시 왜 자신을 찾아오지 않았냐고, 왜 여기 그냥 있었냐고 호통을 치며 안나를 계속 닦달했다. 그러다가 그는 주먹으로 눈물을 훔쳤다.
내가 못나서 그래. 내가 못나서…. 돈 없고, 빽 없어서….
그는 한동안 몸을 흔들며 울먹이다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가자, 여기서 나가자.
그는 안나를 번쩍 안았다.
자기를 여기 그냥 둘 수 없어. 자기는 내꺼야. 내가 데려갈 거야!
그는 안나를 다시 추슬러 안고 문을 열었다. 안나는 두려웠지만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다면 그를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그가 안나를 안고 방 밖으로 나가자마자 긴급 사이렌이 울렸다. 도난경보음이었다. 동시에 안나는 자신을 급습한 두통에 휘둘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눈을 뜨기조차 힘들었다. 그와 동시에 어디선가 권투 글로브를 낀 주먹이 날아와 그를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몸통도 없는, 권투 글로브를 낀 주먹팔 여러 개가 허공을 가르며 그를 두들겨 패는 것이었다. 그는 그 로봇 주먹들을 피하기 위해 팔을 휘둘렀다. 그러나 거침없이, 그리고 끝없이 온몸으로 쏟아지는 주먹들을 거푸 맞고 그는 공처럼 웅크린 채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가 축 늘어져 어떤 방어 동작도 하지 못하자 주먹세례가 그쳤다. 그를 때리던 주먹 가운데 하나가 집게로 변해 그의 뒷덜미를 집어 들고 차 밖으로 내동댕이쳤다. 그 순간 삐 소리 나는 기계음이 캠핑카 안팎을 울렸다.
당신은 이제부터 이 업소 출입금지입니다. 쓸데없는 행동 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이미 생체인식 됐기 때문에 아무리 변장해도 우리를 속일 수 없습니다.
안나는 다시 방에 갇혔다. 그때서야 정신을 못 차리도록 몸을 옥죄던 두통이 사라졌다. 안나는 탈주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자신은 이 방을 벗어날 수 없는 존재였다. 이 방 문지방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이동제한 장치가 작동하고 있고, 잠시 잊고 있었지만 자신은 본디부터 그렇게 프로그래밍된 존재였다. 그렇다고 쉽게 소멸해 버릴 수도 없었다. 어떻게 해야 소멸할 수 있는지 떠오르는 게 없었다. 소멸이란 존재 이탈, 또는 존재 멈춤이 자신에게는 너무나 멀리 있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