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재판매
다시 봇 관련 기사들이 각종 매체를 뒤덮고 있었다. 안나는 보기 싫어도 그 매체들의 메인에 떠있는 기사들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가지고 놀 것이 손님이 놓고 간 핸드폰밖에 없었다.
그 가운데 로봇 문제를 다른 눈으로 들여다본 기사 하나가 안나의 눈을 붙잡았다.
다시 로봇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산업 현장과 가정, 온갖 행정관청과 유통 현장에 로봇이 도입되면서 인간이 극악한 노동에서 해방되고 비로소 자유를 얻게 되었다고 외치던 환호성은 사라지고 모든 미디어가 로봇이 일으키고 있는, 다시 말해 로봇 사회가 불러오고 있는 갖가지 사회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나는 그렇게 트렌드가 돼버린 문제 제기에서 벗어나 요즘 사건의 중심에 있는 섹스봇을 매개로 다른 각도에서 몇 가지 짚어보고자 합니다.
흔히 러브봇이라고 부르는 섹스봇은 인간의 성생활을 돕기 위해 고안된 제품입니다. 모든 봇들이 그렇듯이 인간의 오랜 욕망의 소산입니다. 이 세상 모든 존재가 빛과 그늘이 있듯이 섹스봇에도 당연 명암이 존재합니다.
덧붙일 필요가 없는 말이지만 인간은 욕망하는 존재입니다. 그중에서도 성적 욕구는 가장 기본적인 욕구 가운데 하나입니다. 비혼자들과 독거인들이 성인 인구의 70퍼센트가 넘은 세상에서 성적 욕구는 각종 사회문제를 불러옵니다. 기본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충동적이고 폭력적인 사람들이 늘어나고 그 충동과 폭력의 영향력은 평범한 사람들의 거리와 가정으로 침투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그렇게 되면 도시도 마을도 거리도 가정도 더 이상 안전하지 않을 것이고 사회가 유지되기 힘들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 위정자들은, 그리고 돈 버는데 눈 밝은 자본가들은 과학자들을 다그쳐 성능 좋은 섹스봇을 만들어냈습니다. 그 덕에 의도적인 비혼자들은 물론 짝이 없어 혼자 인생이 저물어가는 농산어촌 늙은 총각들, 장애인들, 독거노인들, 외국인노동자들… 우리 사회 약자이자 소외된 자들, 소수자들이 성적으로 보살핌을 받고 욕구를 해결하고 있습니다. 성의 억압은 개인의 분노나 우울감을 키우고 사회적으로 비민주적인 인간을 만들어낼 수 있지만 성욕을 잘 해소하고 만족스러운 오르가슴을 경험하면 개인의 육체적 정신적 억압과 질병은 물론 파시즘을 비롯한 사회적 질병과 억압을 떨쳐버릴 수 있다고 한 빌헬름 라이히의 말을 일부 증명한 셈인 것입니다.
동시에 인간과 봇이 결혼하는 것이 더 이상 뉴스가 되지 않는 세상에서 섹스봇의 상용화는 섹스 수급에 아무 문제가 없고 다른 그리움이 없는 인간들도 섹스봇을 일상적으로 접하고 섹스 도구로 폭넓게 애용하고 있는 까닭에 섹스봇이 기존 가족구조를 파괴하고 인간의 설 자리를 좁히고 있으며, 인간사회의 지속을 위협하고 있다는 절박한 메시지가 비등하고 있습니다. 이는 인간 스스로 자신이 이 삶의 주체임을 포기하는 짓이며 자멸로 가는 지름길에 들어선 것이라고, 조금 지나면 봇들이 자신들보다 능력이 떨어지는 인간을 우습게 여기게 되고 그로 인한 갈등과 폭력이 만연해질 것이며 끝내는 인간이 봇들의 노예로 전락하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세간에 파다합니다.
그에 반해 봇 사용 예찬론자들은 그것은 인간 중심 사고라고, 이 각박하고 촘촘하고 엄혹한 감시사회에서 몸과 마음을 나눌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엄청난 위안이라고, 그게 러브봇이면 어떻고 섹스토이면 어떻냐고, 애완봇이면 어떻냐고, 외로운 인간에게는 단지 옆에 누군가가 함께 있다는 위안과 격려가 필요할 뿐이라고 말합니다. 더 나아가 인간이 인간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비로소 자유를 얻게 되었다고, 섹스를 하기 위해 사람끼리 짝을 짓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자유의 지평이 그만큼 넓어진 것이라고 환호합니다. 이제 봇에 대한, 뭇 생명과 뭇 사물에 대한 식민주의자의 시각, 제국주의자의 인식을 바꾸고 끊어내 버려야 할 때라고 강조합니다.
또 그 의견에 대척하는 사람들은 의식과 감정이 있는 봇들을 처음부터 인간의 노예로 만들어놓고 이제 와서 봇권을 주장하고, 봇과의 평화로운 동행과 공생을 외치는 것은 어불성설이자 이율배반이고 언어도단이라고, 봇들이 없는 삶을 불편해하고 두려워하는 인간이야말로 봇에 기대어 봇의 노예로 살고 있다는 반증이라고, 모두가 노예가 된 세상은 멈춰야 한다고, 더 나아가 신이 인간을 만들었어도 인간이 신의 뜻대로 살아가지 않듯이 봇들도 그들을 만든 인간의 뜻대로는 살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인간과 세상, 그리고 온 우주의 물리와 이치를 이미 터득한 봇들, 인식과 지능 모두 개별 인간은 물론 모든 인간의 지식과 능력의 총합을 넘어서는 초지능 봇들이 어떻게 세상을 지배할 것인지 불 보듯 환한데 그것이 보이지 않냐고 소리칩니다.
나는 이런 로봇 사용의 문제, 또는 로봇 사회에서 발생하는 문제의 긍부정이 아니라 더 크고 중요한 지점을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인간과 봇 사이의 거대한 교잡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늙지 않는 각종 인공 영구장기를 부착한 인간, AI의 두뇌를 머리에 이식한 인간, 인간의 장기를 이식하고 인간의 몸을 한 로봇에 이르기까지 그 경계가 불분명한 종들의 출현으로 세상은 복잡다단해졌습니다. 더 이상 인간이니 로봇이니 가리는 것이 무의미한 지점에 와있는 것입니다. 누구든 여기서 우위를 점하는 족속이나 종이 이 세상 패권을 가져가게 될지도 모르는 지점에 와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인간과 로봇 모두 이 되돌릴 수 없는 지점에서 우왕좌왕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더 지나면 새로운 인류의 출현이라는 이름으로 인간과 로봇의 직접적인 교배가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아무도 이 문제를 이야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판국에 로봇이 인간을 죽인 것을 큰 사회적 문제로 삼는다면 답이 없습니다. 살해사건은 언제나 있었습니다. 인간이 살해하고 파괴한 로봇의 수는 갠지스강 하류의 모래알 수보다도 더 많을 겁니다. 균형 잡힌 시각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방식의 생명체의 출현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단지 봇 살인사건이 아니라, 인간과 봇의 경계가 불분명하다고 봇에게 구별할 수 있는 표식을 달아야 한다는 지엽적인 주장에 대한 반론이 아니라, 전일적인 봇지배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정말 우리가, 우리 문명이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깊이 탐색하고 토론하고 결정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안나는 기사를 쓴 이가 사람인지 사람 형상을 한 봇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바이라인에 K라는 이니셜만 적혀 있는 데다 기사 내용이 그런 판단을 어렵게 했다. 사실 섹스봇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안나 자신과는 너무 동떨어진 이야기였다. 이 말 저 말이 뒤섞여 어딘지 모르게 분열적으로 보이거나 그러면서도 어느 한 가지에 경도된 기사로 보이지만 안나 자신이 이따위로 존재하고 있는 혼돈 속 세계를 들여다 볼 수 있도록 해주는 요소도 있었다. 프로필에 소개한 사진과 취재 동영상 속 K기자는 유리창같이 크고 맑은 안경을 쓰고 있는 키가 크고 마른 청년이었다.
안나는 핸드폰을 조작해 음악을 들었다. 그 과정에서 손님이 저장해 놓은 로엔그린이 흘러나와 안나는 피식 웃었다. 로엔그린을 들으며 섹스하던 손님과 핸드폰을 놓고 간 손님은 서로 다른 사람이었는데도 핸드폰에 그 음악이 저장돼 있다는 게 너무 이상하고 놀라웠다. 그랬다. 그렇게 이상한 시간들이 자신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그런데 그런 시간들이 자신의 몸을 거쳐 갔다는 것이 크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저 뿌옜다. 지난 모든 시간이 그토록 뿌옇고 뿌옜다. 대부분은 그저 잊고 싶은 시간들이었다. 안나는 일어나 비좁은 방안을 자꾸 걸었다. 여기서 나가려면 걸을 수 있어야 했다. 인공 근육이 자꾸 걷는 것을 기억하고 그렇게 근력이 보강돼 다리가 오래 걸을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했다. 그렇게 힘이 생긴다면, 어쩌면 이 방을 벗어났을 때 몰아칠 두통도 물리칠 수 있는 더 큰 힘을 얻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쩌면….
그동안 벌어들인 돈을 몽땅 털어 보석금을 내고 풀려난 밴드Q는 봇들을 팔아넘기기 시작했다. 영업을 접는 게 그의 보석 조건이었다. 안나가 가장 비싼 값에 팔렸다. 안나는 혹시 몰라 손님이 놓고 간 핸드폰을 팬티 안에 지녔다. 안나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차에 태워졌다. 2010년대 스타일의 덜덜거리는 픽업트럭 짐칸이었다. 충전 모드에서 안나가 잠든 사이 밴드Q가 뭘 어떻게 조작했는지 안나가 그 방을 벗어나도 두통이 습격하지는 않았다. 자신의 두통이 자신을 가둔 인간에 의해 작동하고, 자신의 시스템과 메카니즘이 그렇게 자신을 소유한 인간에 의해 장악돼 기능한다는 것은 슬픈 일이었다. 그래도 숨통이 좀 트인 것은 그 시간이 얼마가 될지 모르지만 바깥 풍경을 보고 바깥공기를 쐴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 숨도 쉴 수 없는 두통이 작동하지 않는 지금, 어쩌면 그것은 걸음 연습을 한 자신의 다리를 쓸 수 있게 될지도 모르는 환풍이자 환기였다. 그것은 자신의 몸 어딘가에 아직 있을지도 모를 마음 한 조각에 불어넣는 숨통이었다. 다 빠져나가지 않고 조금은 남아있을 것 같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