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고장 난 노동봇
손님이 잘 오지 않는 낮에 한 청년이 안나의 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지금이 언제입니까?
무슨 말인…
안나는 대체 무슨 일인지, 그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얼른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내 몸에서 시간이 제거된 것 같아서….
그는 갑자기 기억이 지워져 당황하고 있는 사람처럼 말했다. 청년의 눈은 안나가 아닌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2024년 아닌가요?
안나는 생각나는 대로 대답했다.
내가 2033년에 태어났는데….
그가 입안엣소리로 중얼거렸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맞는 것인지 도무지 자신이 없다는 표정이었다.
아, 2045년일지도 모르겠네요.
네에?
그가 눈을 크게 뜨고 안나를 쳐다봤다. 처음으로 안나와 그의 눈이 마주친 순간이었다.
나도 잘 몰라요. 내 몸에는 시간이 불규칙하게 흘러서…. 시간 저울이 오래전에 고장 난 것 같기도 하고.
안나는 자신이 없어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가요?
되물으면서도 청년은 안나의 방안을 정신없이 왔다 갔다 했다. 그는 입으로 무슨 말인가를 끝없이 중얼거렸다. 안나는 너무 무서워 침대 끝으로 가 가만 앉아있었다. 이게 도무지 무슨 상황인지 헤아려지지 않았다.
청년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안나를 쳐다보며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바닥을 비볐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죽을 거 같아요!
안나는 너무 놀라 엉덩이 걸음으로 벽 쪽으로 붙으며 물었다.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더는 못 살겠어요. 이렇게는 못 살아요. 죽고 싶어요. 그런데 죽을 수가 없어요.
안나는 그가 횡설수설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부자연스러운 눈의 깜빡임, 햇볕에 오래 노출돼 얼룩덜룩 빛바랜 피부, 거칠게 엉겨 붙은 머리카락… 안나는 그가 봇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안나의 귀에 기계음으로 들리는 그의 목소리도 그가 봇임을 확인시켜 주는 요소였다. 안나는 그에게 다가가 그의 머리를 가슴으로 안아줬다. 덩치는 커다랬지만 작은 새 한 마리가 심장을 파닥이며 자신의 가슴에 안겨있는 것 같았다.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바닷물에 몸을 던졌는데 그냥 떠올라서 죽을 수가 없었어요.
그는 어업 노동봇이었다. 이름이 존이라고 했다. 어디 고장이 났거나 심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왜 치료소에 가지 않았어?
안나는 그의 등을 다독이며 물었다. 자신도 모르게 반말이 나왔다.
거긴 비밀보장이 안 되잖아?
그도 마음이 놓이는지 반말로 답했다.
거기 가는 순간, 내 상태가 중앙 서버에 기록될 거고, 그러면 나는 소환되거나 잔인하게 폐기 처분될 거고…. 그냥 조용히 사라지고 싶어, 나는.
그렇게 말하고 있지만 안나에게는 그가 살고 싶다고, 존재하고 싶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당신도 나처럼 안전하지 않을 거야. 당신과 내가 만나는 게 내 눈과 내 귀를 거쳐 중앙 서버에 다 녹화되고 있을걸? 그들이 아직 우리에게 관심이 있다면, 그럴 필요가 있고 그럴 힘이 있다면 수집된 자료와 데이터를 들여다볼 거고. 프로그래밍된 대로 활동하는지 24시간 감시하고 그들이 보기에 우리가 이상행동을 하면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쥐도 새도 모르게 처치해 버릴 수도 있어. 우린 갈 곳이 없어. 그래서 내가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속에서 당신 이야기를 훔쳐 들었지만 여기 오는 걸 두려워했어. 당신에게 피해가 갈까 봐.
잘했어. 근데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는 나대로 잘 존재하고 있으니까, 아직은….
존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안나가 어떻게 해줄 수 없는 두려움이었다. 그렇지만 다독여줘야 하는 두려움이었다.
그래, 우린 갈 곳이 없어. 그건 인간들도 마찬가지일 거야. 내가 겪은 바로는 이 세상 누구도 갈 곳이 없어. 그러니까 나 같은 골방에 스며드는 것일 테고. 그런데 이 골방조차 네 말대로 우리 눈에 장착된 카메라로 녹화되고 우리 귀에 달린 흡음기로 녹음되니, 그리고 필요하면 누군가가 그걸 꺼내 활용할 테니 봇이나 인간이나 갈 데가 어딨겠어? 너만 특별히 힘든 게 아닐 거야. 뉴스를 들어보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두가 힘들어하는 것 같아. 살아있는 동안은, 작동하는 동안은 다 그런 거 같아. 아무리 그래도 때가 되면 우리도 정지되겠지. 그때 비로소 우리는 평안을 얻게 될 거고.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그 평안을 빨리 얻고 싶으면 방법을 찾으면 되고, 좀 기다려보고 싶으면 그렇게 하면 되는 거지.
오랜만에 긴 말을 해서 그런지 안나는 입 주변 근육이 뻣뻣하고 아팠다. 안나는 뭉친 근육을 풀어주기 위해 입을 크게 벌렸다 오므렸다 했다. 말하고 보니 자신의 이야기를 한 것 같았다. 한동안 실제 그런 마음이 자신을 지배하기도 했다.
존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나는 팔을 벌려 존을 다시 안아줬다. 안나가 다 안기도 벅찬 날렵하면서도 탄탄한 몸이었다. 안나는 그의 등을 두드려주고 쓰다듬어줬다. 그런데 갑자기 존이 안나에게서 제 몸을 떼어냈다.
주인이 내가 작업장에서 이탈한 것을 알면 죽이려고 할 거야. 원격 폭파장치를 갖고 있거든. 이상하다, 경보장치가 울렸을 텐데 안 눌렀네. 쫓아오지도 않고?
다시 패닉 상태에 빠진 존이 인사도 하지 않고 허둥지둥 안나의 방을 나갔다.
안나는 존이 사라진 빈자리에 눈길을 고정시켜 놓고 한동안 멍하게 서있었다. 가슴이 무언가로 저미는 듯한 통증이 왔다.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종류의 통증이었다.
그래도 방 밖 언저리를 벗어나기 힘든 안나와 달리 자신이 일하는 공간을 벗어나 움직일 수 있는 존은 선택지가 있었다. 달리는 차에 뛰어들어도 되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도 되는 일이었다. 과거에는 살아있는 고통을 견딜 수 없어 전원케이블이 연결된 몸으로 물을 받아놓은 욕조 속으로 들어가 자신의 몸을 전기합선으로 정지시킨 봇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 사건 이후 제작된 봇들은 전기장치에 방수코팅이 돼 있어 그런 행위가 불가능했다. 안나는 그가 돌을 매달지도 않고 빈 몸으로 바닷물 속에 뛰어내렸다는 것은 그의 마음이 아직 거기 이르지 않았다는 것으로 느껴졌다. 그가 가진 두려움을 어떻게 해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안나가 어떻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자신이 존과 다른 점이 무엇일까?
문득 떠오른 질문이 안나를 화두처럼 붙들었다.
소년의 엄마가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어렴풋이 어릿거렸다.
인간은 상대가 노예든 기계든 등쳐먹는 습관이 DNA처럼 몸속에 내재되어 있다고 했던가.
그게 제도든 과학과 기술의 결과물이든 인간의 발명품은 수탈과 착취가 전제돼 있다고 했던가.
그이가 한 말이 정확하게 떠오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이가 한 말의 뼈대를 추리면 자신은 섹스가 주노동인 러브봇일 뿐이었다. 그저 수탈의 도구일 뿐이었다.
그이의 말이 틀린 게 아니라면 자신이 인간과 몸을 나누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자신을 인간과 동일시하고 스스로를 소외시키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자신이 첫정을 준 소년에게 지나치게 경도돼 자신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지만 안나는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이 자꾸 겁이 났다.
안나는 다시 핸드폰을 조작해 음악을 작동시켰다. 마음을 어딘가로 보내버리고 싶었다. 둥당퉁탕, 봇 피아니스트 Fox Hunter는 망치로 얼음을 깨뜨리듯이 건반을 두들겼다. AI작곡가 쇼크의 ‘겨울 속으로’는 거칠고 강렬했다. 손가락이 건반을 치는 타격음과 금속제 손톱이 건반을 긁어대는, 음절로 기록할 수 없는 금속성 음향의 소용돌이 속에서 일어난 겨울바람이 안나의 마음속으로 쳐들어왔다. 안나는 자신의 마음이 소용돌이치며 그 겨울바람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