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 안나 2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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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25. 시골여관

by 정의연 Dec 17. 2024

들판에는 노랗게 익어가는 벼들이 가을을 색칠하고 있었다. 그 노란 가을 들판 끝에 마을이 있었다. 안나가 그 말을 온전하게 알아들으려면 시간이 좀 걸리는, 말씨가 느린 바닷가 근처 작은 읍내였다. 그 읍내 한 귀퉁이, 큰길에서 골목으로 한참 쑥 들어간 곳에 기역자 단층 목조주택 한 채가 있었다. 옛 골기와 꼴 검은 강판을 가지런히 얹은 팔작지붕도 고풍스럽고, 오래된 나무 기둥과 벽과 벽 사이, 유리창과 창틀 사이에 백 년쯤 더께가 진 먼지들이 터주처럼 앉아있는 오래된 여관이었다.

 

안채와 마루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는 손님방은 셋이었다. 두 방에 이미 손님을 받고 있는 봇들이 있었다. 안나는 대문에서 가장 가까운 문간방에 배치됐다. 그 방에는 침대와 옷걸이, 화장대와 오래된 텔레비전과 다탁, 의자 두 개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방에는 딸린 화장실이 따로 있었다. 그러고도 공간이 넉넉했다.

 

침대 위 벽에는 ‘까치호랑이’가 걸려있었다. 나쁜 운은 막고 좋은 일을 불러들인다는 기원을 담아 새해맞이 선물로 주고받았다는 아주 오래된 조선시대풍 민화였다. 자그마한 족자에 담겨 녹슨 쇠못에 걸린 그림은 색이 바래고 오래된 먼지가 물결무늬로 앉아있는데도 호랑이의 익살스러운 표정과 소나무 위에서 그런 호랑이를 내려다보며 놀려먹는 까치의 짓궂은 표정이 너무도 생생해 안나의 얼굴 근육을 저절로 풀어지게 했다.


드나드는 문은 미닫이 겹문이었다. 바깥문은 반투명 유리문이고, 안쪽 문은 커다란 격자무늬 나무 문살에 한지를 바른 것같이 모양을 낸 유리문이었다. 밖에 마름모꼴 철망이 쳐있는 미닫이 반대편 창문도 같은 구조였다.

 

창문 밖은 대숲이었다. 바람에 부딪치며 수런거리는 댓잎소리가 귀에 청량했다. 안나는 숨통이 좀 트이는 것 같았다. 주인은 여관만큼이나 오래된 백발의 할머니였다.

  

고맙다, 여기까지 먼 길 와줘서.


주인 할머니는 쭈글쭈글 주름진 손바닥으로 안나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까딱하면 도망치고, 수틀리면 술 처먹고 말썽 피는 그눔의 머리 검은 짐승들한테 시달리느니 말 잘 듣는 니들이 백배 낫다, 백배 낫어.


할머니는 밴드Q가 더 나은 값에 팔아먹기 위해 샛노랗게 염색해 준 안나의 머리칼과 손등을 쓰다듬고 또 쓰다듬었다. 밴드Q는 마치 큰 인심을 쓴다는 듯 안나의 몸에 값싼 애액을 가득 채워주고 안나의 엉덩이를 툭툭 두들겨줬다.

 

밴드Q가 떠오른 순간 안나는 저절로 몸이 오그라들었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챙겨주는 인사말을 들으니 얼떨떨했다. 다른 시간이 펼쳐지고 있는 것일까? 알 수 없었다. 방 밖으로 발을 내딛어도 갑작스러운 두통의 습격은 없었다. 이동제한장치가 어디까지 작동하는지 몰라도 방 밖을 드나드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다리 힘이 약해 더 걸을 수는 없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마음속 이정표도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두려움이 방 밖으로 나가는 것을 자꾸 막았다.

 

이곳 손님들은 봇과 한 번 해보겠다고 호기심을 앞세워 찾아오는 손님들 몇 빼고는 대부분 얼굴이 검게 탄 나이 든 농촌 총각들과 바닷가마을 늙은 총각들, 끈 떨어진 홀아비들이었다. 그들은 한 사람씩 따로 오기도 했지만 세 사람씩 함께 들어와 자신들에게 배정된 방을 찾아 들어가며 시끄럽게 떠들고 스스럼없이 성적 농담을 주고받기도 했다. 안나는 캠핑카 시절과 너무 다른 그런 활기가 낯설었다. 그러나 이내 적응이 됐다. 달리 생각하면 그것은 부끄러움의 다른 표현이거나 자연에 가까운 건강함 아닐까 싶기도 했다.

 

너 같으면 함께 살아도 탈이 없겠다. 사람보다 낫다.


그 마을에서 안나의 첫 번째 손님은 올해 환갑이 됐다는 바닷가마을 늙은 총각이었다. 그는 안나와의 만남에 만족스러워하며 안나를 한 번 안아주고 등을 두드려준 뒤 자신의 옷을 입었다. 그는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왔다. 어느 늦은 밤 술에 잔뜩 취해 찾아와 문득 자신의 이름을 갑수라고 밝힌 그는 안나의 이름은 채 묻지도 못하고 안나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잠이 들었다.

 

얼라, 니가 내 집인 줄 알았나 보다!


새벽잠에서 깬 그는 툭 한 마디 던지고 바다로 갔다. 안나는 정수리 부근이 산속 옹달샘처럼 벗겨진 그의 머리와 구부정하면서도 탄탄한 그의 등에 그가 쌓아놓은 세월이 생의 이력처럼 얹혀 있다고 생각했다.

       

손님들은 주로 저녁 시간에 왔다. 그들은 저녁 먹고 술 한 잔 하고 차를 한 잔 마시듯이 봇들을 안고 갔다. 

안나는 손님이 없는 낮시간에는 캠핑카 시절 습득한 핸드폰으로 음악을 들었다. 핸드폰 배터리는 늘 가득이었다. 빛이 조금만 있어도 핸드폰 스스로 충전을 해서 안나가 관리하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외로울 거야, 너는 무척

너를 만나기 전까지 너는.

어쩌면, 어쩌면 너를 만나도 너는

여전히 외로울지도 몰라.

너는 너이기 때문에.

그래도 멈추지 마!

너는 너를 만나야 해.

그게 네 존재 이유야.

그게 네 사랑이야. 

이 세상 가장 큰 사랑은 바로 너야.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너야.

너는 너야!



너 자신을 사랑해! 한동안 세계적으로 유행했다는 BTS ‘Love Yourself’의 계보를 잇는 AI안드로이드 가수 하이브리드솔리드의 노래였다. 안나는 그런 노래가 있는 줄도 몰랐었다. 노래를 듣고 있다 보면 안나는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다른 시간대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또 그렇게 음악을 듣고 뉴스를 듣다 보면 자신이 이 세상의 일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세상과 연결된 끈이 아주 끊어진 존재는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쑥 들기도 했다. 엉뚱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안나는 문득문득 이렇게 낡고 다 닳아져서 마감이 돼도 나쁠 것은 없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가끔씩 피부빛깔이 좀 검은 제3세계 외국인 농업노동자들, 어업노동자들이 한국인 손님이 없는 시간을 택해 성급하게 일을 치르고 날 듯이 가버렸다. 그들은 이곳에서 한국인들과 부딪치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들은 저급 AI를 탑재한 노동봇들로 빠르게 대체되고 있어 급격하게 일자리를 잃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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