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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언 Jul 16. 2020

가장 공평한 회식 메뉴

회식을 안하는 것이 가장 공평하지만,


1. 메뉴 선정의 난


나는 막내라는 이유만으로 메뉴 선정에 대한 전권을 부여받곤 했다. 이 팀원 저 팀원 입맛을 취합/반영하기란 생각보다 까다로운 일이었다. 어느 해 송년회였던가, 고심 끝에 꽤나 비싼 양고기 집으로 장소를 정하고 공지를 했다. 그런데 한 과장이 자신은 양 냄새를 역겨워한다며 너무 배려가 없다면서 난리법석을 피운 일이 있었다. 그는 선약도 없고 송년회에 꼭 참석하고 싶지만, 단지 메뉴 때문에 불참할 것이라며 공공연하게 떠들고 다녔다. 다른 메뉴를 주문해 주겠다고 회유했지만 그 냄새 자체가 싫어 장소에도 가지 않겠다며 뻗대었다. 그 한 명 때문에 모두에게 공지된 회식장소를 바꿀 수도 없어 무척 난감했던 기억이다. 그 과장은 끝끝내 송년회에 불참했다.


2. 짬에서 나오는 메뉴 선정


언급된 사태를 비롯한 다사다난한 회식을 겪은 이후 나는 어느 정도 짬이 찬 막내가 되었다. 회식 어레인지가 주어지면 되도록 무난하며, 손이 덜 가고, 완성된 형태로 나오는 메뉴를 정한다. 이를테면 족발이랄지, 중화요리 코스랄지, 일품요리랄지 하는. 가장 선호하는 건 중국집 코스요리다. 특히 원형 테이블에 회전 탁자가 세팅되어있는 그런 곳. 내가 안 가져다줘도 되어서 좋다. 찬 접시를 받아서 회전 테이블에 올려놓고 돌려주면 그만이니까. 메인 요리를 덜어 먹어서 찝찝하지도 않다.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삼겹살 등의 육류구이 회식은 반드시 피해야 한다.(한우 제외) 남의 살은 다 맛있다는 신조 아래 육류를 누구보다 사랑하지만. 누군가는 구워야 하기 때문에 손이 많이 간다. 그리고 그 손은 높은 확률로 내 손이라는 것도 이제는 알고.


3. 회식 직무 설명서


전쟁 같은 메뉴 선정을 마무리하고 막상 회식이 시작되면 막내라인의 노동이 끝나는가? 전혀.

식당에 들어서기 무섭게 냅킨을 내어서 수저를 놓고, 물을 따른다. 물을 안 마시는 사람도 있지만 일단은 따라서 두당 한 컵씩 놓아준다. 기본으로 세팅된 반찬부터 주워 먹기 시작하면, 찬그릇이 빌 때쯤 리필을 요청해야 한다. (이럴 때 가장 싫은 게 셀프 바다.) 메인 메뉴가 나오면 궁금하지 않더라도 입맛에 잘 맞는지 확인도 해야 하고, 개코만큼도 재미없는 농담에 힘껏 웃어주기도 해야 한다. 술잔이 비면 채우고, 소맥은 황금비율로 말아야 하며, 술병이 비면 그때그때 추가 주문을 해야 한다. 이때 너무 많은 술을 한꺼번에 주문하면 또 안된다. 찬기가 가시기 때문에 싫단다. 다 마신 술병은 카운트를 위해 한데 곱게 모아 둔다. 회식자리에서 조차 일 얘기가 나오면 경청하는 척 한 귀로 흘리는 하이브리드 히어링 시스템도 필요하다. 나도 처음 가는 곳이지만 화장실이 어딘지 알려줘야 한다.(제발 식당 직원에게 물어보셨으면..) 대리운전 명함을 쥐어드리고 법카를 건네받은 후 카운트 한 술병대로 정확히 계산되었는지 확인하면 그제야 끝. 쓰면서 되뇌어 보니 사무실에서 본업무 보다 더 피곤했던 듯도 싶다.


4. 가장 공평한 회식 메뉴


존경하는 이 부장님은 상명하복의 경직된 조직 속에서 유난히 빛나던 '배운 사람'이었다. 아주 바람직한 회식에 대한 개념을 갖고 계셔서 놀라울 따름이었다. 부서장까지 역임했던 이 부장님은 저녁 회식 지양하고, 점심 회식이나 일과 중 간식타임을 종종 개최하곤 하셨다. 헌데 이런 이 부장님께 고민이 있다고 하셨다. 예컨대 치킨을 시키면 부하직원들이 본인에게 닭다리 같은 맛진 부위를(?) 주고, 다과회를 열어도 제일 비싼 과자나 음료를 본인에게 내어주고, 혹시 식당에 가더라도 메인 요리를 본인 앞에 세팅해 주는 것들이 영 마음이 편치 않으셨던 것. 고심 끝에 부장님은 메뉴를 '피자'로 결정했다고 하셨다. "피자는 다 같이 똑같은 걸 먹을 수 있잖아요. 전 그래서 피자를 선호합니다." 공평하게 나눠진 조각에 균등하게 올려진 토핑까지! 이 부장님의 솔로몬과 같은 선택에 무릎을 탁 칠수 밖에 없었다.

공평한 핏짜 (출처 도미노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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