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환은 깜짝 놀라 자기 자리로 달려와 앉아 버렸다.
‘이게 무슨 일이지? 저 여자는 아무리 봐도 바로 그 여자야. 난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설마, 아, 그래, 역시 밖으로 나가야 하는 거겠지? 그래. 그게 낫겠어.’
지환은 눈치를 보듯 슬며시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자가 지환을 빤히 보고 있었다. 유니폼을 입은 몸에는 팔 다리가 모두 잘 붙어 있었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신체를 가진, 인간이었다.
여자가 지환에게 걸어 왔다.
이 순간에도 지환은 저 여자는 위험하다, 라고 생각했지만, 빠르게 달려 사람들이 깨어 있는 이 시간에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어쩐지 이 사무실에서 밖으로 나가기가 싫었다.
여기서 나가면 저 게임 기획안을 다시는 못 만들 것 같았다. 몇 달이고 계속 매달려왔던 이 게임의 기획안. 이 게임이 없으면 자신의 인생조차 없어질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은 잠잠해진 폭발 사고가 자신이 나가자마자 여기저기서 터져나올 것만 같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수도승들에게 크게 해를 입을 것만 같았다.
‘이 일만 다 하면 나갈 수 있을 것 같아. 일을 완성하면 나도 안전해질 것 같아. 떼돈을 벌어 다른 세상이 되겠지? 아니, 그것보단 내가 여기 지박령이라도 된 것 같아. 정말 나가기가 싫어. 아니 나갈 수가 없어. 이 일을 다 마치고 나서야 누군가에게 허락을 받아 나갈 수 있는 느낌이 들어.’
여자가 지환이 있는 칸의 문을 열었다. 지환은 자기 칸막이에 문이 스르르 열리는 것을 보면서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아까 전까지는 보지 못했던, 자기가 쓰던 문에는 누군가 잔뜩 긁어놓은 듯한 자국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이었다.
여자는 지환을 내려다보며 무표정하게 말을 걸었다.
“여기에 계속 있으면, 여기가 네 무덤이 될 거야. 너를 크게 해칠만한 것은 없지만, 너는 영원히 여기서 나갈 수도 없고, 간신히 연명해 나가게 될 거야. 늦을수록 곤란해. 어서 여길 나가. 아니면 이걸 잡아.”
지환은 저 귀신이 자꾸 자신을 여기서 나가라고 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하지만 정말로, 나가기가 싫었다. 답답한 원룸도 싫었고, 그 좁은 원룸에서 자꾸만 기어 나오는 벌레도 싫었고, 일을 마무리하지 못해 따라올 후회와 비난도 꺼려졌다. 무엇보다 당연히 자신이 있을 수 있는 곳에서, 귀신에게 밀려서 여길 나가는 것 자체가 찝찝한 일이었다.
여자는 지환에게 계속 말을 해다.
“너 집에 간 적이 있어? 진짜 집이 있긴 있어? 니가 하는 일이 진짜 중요해? 너가 지금 하는 일이 뭔지나 알고 있어? 그거 진짜 꼭 해야 하는 일이야? 그게, 진짜 네게 부귀 영화를, 네가 바라던 삶을 가져다 줄 거라 생각해? 바라는 것이지 너도 믿는 건 아니잖아. 너, 진짜 여기에 있고 싶은 이유가 뭔지나 알아?”
여자가 늘어 놓는 질문들에 처음엔 지환이 혼란이 더해졌다.
여자는 다시 이 괴랄한 끈을 내밀었다.
“이걸 잡아봐. 그럼 다 이해하게 되니까.”
처음엔 오래된 물건처럼 보이던 그 끈이 지금은 다이너마이트의 뇌관처럼 보였다. 만지면 폭발할 것 같았다.
“나, 난, 이대로 죽고 싶지 않아. 알 수 없는 폭발로 사람들이 죽었는데, 전쟁에서도 죽어가는데, 난 여기서 죽고 싶지 않아. 난 죄가 없어.”
여자가 작게 한숨 쉬는 느낌이 들어, 지환은 여자 얼굴을 다시 올려다 보았다.
“폭발 사고로 죽은 사람들이라고 해서, 죄가 있는 건 아니잖아. 단지 그 자리에 있어서 죽은 것이지. 당신이 뭘했건 안 했건 간에, 때로는 ‘장소’가 대단히 많은 것을 결정내리지. 원래 행운도 불행도 자랑할만한 건 아니잖아? 단지 장소문제일 때가 많다고!”
지환은 덜덜 떨었다. 여자가 하는 말을 알 것 같기도 하지만, 어딘가 회로가 차단된 것처럼 이해가 되질 않았다. 여자는 안됐다는 표정으로 지환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넌 여기에 있기 때문에 계속 과제는 미완이고, 먹을 것도 부실하고, 잠도 불편해. 그냥 이걸 잡아.”
불편한 것은 사실이었다. 작은 불편이라도 누적되면 큰 불편이고, 그건 지환에게 심각한 문제였다. 지환이 가장 싫어하는 게 불편한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저걸 잡아봤자 무슨 일이 있겠나, 싶었다.
드디어 지환은, 여자가 내미는 다이너마이트의 뇌관같은 끈을 잡았다. 저걸 잡으면 모두 다 이해가 될 것만 같았다. 자신이 여기 있는 이유를. 그리고 저 여자가 하는 말을.
털썩, 지환이 쓰러지는 소리에 공유 오피스 사람들 모두가 몰려 들었다.
“여기, 사람이 죽었어요! 숨을 쉬지 않는 것 같아!”
사람들은 이미 정신이 떠나간 지환의 몸을 되살려 보려 안달이었지만, 이미, 지환은 그곳을 떠난 후였다.
****
지환은 눈을 떴다.
여전히, 공유 오피스의 자기 자리였다. 그리고 방금 그 여자가 옆 책상에 앉아 있었다.
"어어.."
지환은 그녀의 이름을 이제, 막 다시 기억해 냈다.
“어어, 가영아, 네가 왜 여기에 있니?"
"오빠가 너무 안 돌아와서, 깨우러 왔어."
"아, 그래. 너무 몰입했었어. 엄마가 돌아오셨다고 했던가? 다행이야.”
“돌아오시긴 했는데, 엄마 같지가 않아서, 다른 곳에 부탁을 좀 해놨어.”
“아, 그래? 아, 근데, 너무 이상하다. 이번 판에선 네가 여자 귀신으로 나왔었어. 너무 현실 같아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
가영은 그런 지환을 안쓰럽다는 눈으로 내려다 보았다.
“그랬겠지. 현실과 그렇게 비슷하게 설정해 버리니까 못 빠져 나오는 거잖아. 나오고 싶어서 아주 파티션을 박박 긁더만. 꿈 속에선 파티션이 괜찮았어?”
“엉망이었어. 근데 어쩌다 니가 귀신으로 나왔지?”
“오빠를 게임에서 나오게 하려고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데.”
“아, 일부러 개입했던 거야?”
“응. 막판에 오빠가 계속 과제를 완료하질 못해서, 못 나오는 거야. 그냥 간단한 과제로 게임을 끝내려면 내가 개입해야 하더라구.”
“아, 그래. 작은 끈.”
“응. 그 끈만 잡으면 과제를 완료하는 것으로 설정했었지.”
“근데, 너 진짜 무섭게 나왔었어.”
“데이터 오류 때문이야. 원래 청소하고 간식 채워 넣는 NPC로 등장 했어야 했는데, 자꾸 전송 에러가 나는 거야. 목 위만 전송되고, 키높이가 잘못 전송되고, 위치도 정해진 위치로 정해진 게 아니라 여기저기 엉망으로 전송되고 그랬어.”
“하, 어떻게 그런 일이.”
“수도승들이 방해한 거지, 뭐.”
그런가, 여기서도 수도승이 있었나, 라고 아직 꿈에서 덜 깨어난 지환은 생각했다. 하지만 가영에게 말을 하진 않았다. 정상인 척 하고 싶었으니까. 지환은 화제를 전환하고 싶었다.
“근데, 내 게임은 성공 했어?”
가영은 지환을 돌아보았다. 게임 속에서 보았던 그 여자와 완전히 똑같은 표정이었다.
“아직도 깨어나질 못했구나. 그건 그냥, 오빠가 설정했던 게임 속 조건이었잖아. 게임 시나리오를 다 써야 미션 클리어고. 무의식에서 초자아가 그걸 다 쓰면 현실 문제도 다 풀릴 것 같다고 횡설수설하면서, 들어갈 때도 요란하게 들어가더라니. 그리고 바디워치로 계속 보고 있었는데, 오빠 뇌파가 점점 더 이상해 졌었어. 아마 가상세계에서도 혼미했었을 걸?”
지환은 멍하니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과거 번화가였던 이 거리엔 인적이 드물고, 군데군데 폭파된 자리가 있었다. 가끔씩 수도승처럼 차려 입은 사람이 빠르게 지나갈 뿐이었다. 사람들은 그들과 마주치면 소스라치게 놀라서 차에 타거나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여긴 진짜 세계가 맞니?”
가영이는 혀를 끌끌 찼다.
“가상 현실을 실제와 너무 똑같이 복제하면 저렇게 실감이 나는구나.”
“이상하다. 그곳에선 모든 것이 다 현실이었는데, 아직도 그 감이 생생해.”
“오빠의 관념 속에 들어가니까, 그 속에선 모든 것이 다 현실이지 뭐.”
지환은 소름이 끼쳤다. 아까 그곳은 가상의 세계지만 또한 내가 만들어낸 현실이고, 그곳에선 아직도 사람이 살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런데, 가영아, 여기라고 복제가 없을까? 아니, 아니지. 여긴 복제가 아닐까?”
가영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서신과 사진을 보여 주었다. 수도원 사진이었다.
지환은 눈을 떴다. 이제 진짜로 문제들을 해결해야 할 때다.
“시작은 그 수도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