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스케이트 한 번 신어 본적 없는 사람들도 '트리플 액셀'은 알게 되었다. 김연아 선수 덕분이다. 2010년 김연아 선수가 올림픽 금메달을 확정 짓던 그 무대를 기억한다. 나와 친구들은 우리나라에서 저런 선수가 다시 나올 수 있을까 놀라고 감탄했다. 신체적 기량은 물론 예술적 감각과 배포 두둑한 담력까지 가진 그녀를 타고난 천재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도 나의 시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타고난 재능, 하늘이 내린 기량. 과연 우리는 김연아의 무엇을 얼마나 알까. 어째서 그녀가 성취한 것을 타고난 재능 덕분이라고 단정 지었던 걸까?
몇 개월 전 10살 딸아이는 커서 아이돌 가수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말했다. 나는 아이의 꿈을 꺾는 말을 서슴없이 던졌다. "춤이나 노래 운동 같은 건 좀 타고나야 해. 그건 노력으로 따라잡기가 어려운 영역인걸." "네가 그쪽으로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내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전달하는 바는 확실했다. 너는 춤이나 노래에는 재능이 없으니 애초에 다른 길을 찾아보는 게 좋을 거야.
'그릿'을 읽으며 내가 딸아이에게 큰 실수를 했음을 깨달았다. 내가 쉽게 내뱉은 말들은 결국 그녀의 사고방식의 바탕이 될 수 있다. 그녀도 나처럼 재능에 과도한 가치를 두고 스스로 넘을 수 없는 벽을 세울지도 모른다. 내가 아이돌 가수에 대해 뭘 알기에 그들의 퍼포먼스를 타고난 재능으로 퉁쳐버린단 말인가.
김훈 작가의 자전거 여행을 읽다가 남편에게 말했었다. "미쳤다. 이런 글은 노력으로 나오는 게 아니겠지? 날 때부터 언어 감각과 관찰력이 남달랐을 거야. 그리고 천부적인 표현력이 있어야지, 연습한다고 되겠어?" "당신, 냉이 된장국 먹으면 어떤 생각이 들어? 나는 냉이 된장국을 먹으면 음 씁쓸한데 맛있다. 냉이 향이 물씬 나. 그 이외에는 생각나는 게 없거든, 근데 김훈은 냉이 된장국을 두고 한 페이지가 넘게 썰을 풀더라. 정말 미쳤나 봐."
그가 뚝딱 며칠 만에 써 내려간 글인지, 수십 번을 고쳐 쓴 글인지 알 수 없다. 나는 그를 모른다. 그저 그가 쓴 소설 두 편, 에세이 한 편을 읽은 것이 전부다. 그러고는 그리 쉽게 그의 작품을 타고난 재능의 결과물로 평가했다. 그가 정말 타고난 언어 감각을 지녔든 아니든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내가 성취할 수 없는 수준의 경이로움에 대해 내가 갖는 태도 자체가 문제인 것이다.
반대로 누군가의 성취나 결과가 형편없다면 우선 재능(지능)이 부족한 게 아닌가 의심부터 하곤 했다. 딸아이와 수학 공부를 하다가 부딪히거나 감정을 상하는 일이 많았다. 그다지 어렵지 않은 문제가 이해가 안 된다고 하거나 계산이 틀리면 짜증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나를 닮아서 머리가 나쁜가?'
곰곰이 생각해보면 수학 문제를 제대로 풀지 못하는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일 수도 있다. 아이가 짜증이 난 상태로 책상 앞에 앉아있거나 문제 풀이에 관심이 없을 수 있다. 문제를 풀기 위한 배경지식이 부족할 수도 있고, 개념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해서 실제로 적용하는 것이 어려울 수도 있다. 나는 그 모든 경우의 수는 깡그리 무시하고 짜증이 났다. '머리가 나쁜가?'
몇 년 전 학교에서 4학년 영어과목을 가르쳤었다. 여러 번 알려줘도 다음 수업 시간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알파벳을 깡그리 잊어버리고 오는 학생이 있었다. 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이 머리를 어쩔 거야, 이 머리로 어쩔 거야?' 이것은 교사로서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나는 그랬다. 아이의 가정환경이나 배우려는 노력 등은 그다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자라면서 티비나 방송, 책에서 큰 성취를 이룬 사람들의 이야기를 자주 접했다. 애초에 나와 '그들'은 다르다고 믿었다. 그들의 압도적인 성취나 결과물을 재능 때문이라고 여기는 것이 가장 직관적이고 이해될 만한 설명이던 것 같다. 그 성취의 여정을 함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생각을 통해 나의 나약함은 면죄부를 얻을 수 있었으리라. '그들은 특별해, 난 그들만큼 재능이 없으니까. 내가 이만큼인 것은 내 재능 때문이지'
'그릿'의 저자가 오랜 시간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나의 편견과 고정관념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큰 성취는 지속적인 노력의 결과물이고 성공의 문을 여는 것은 한 가지 목표를 향한 지속적인 노력이다. '그릿'을 구성하는 두 축은 열정(오랫동안 같은 목표에 일관되게 집중하는 것)과 끈기(어려움을 극복하고 다시 하는 것)다. 그녀는 나를 어르고 달래는 '그릿'의 중요성을 강조한 다양한 이야기를 실었다. 그 사례들은 나를 질책하고 응원했으며, 또 설득했다.
이 책에는 저자가 실험자들의 '그릿' 점수를 측정하기 위해 사용했던 문항들이 실려있다. '당신이 그릿 척도에서 어떤 점수를 받았든 자신을 성찰해볼 계기가 되었길 바란다.' 저자의 말이다. 저자의 바람처럼 책을 읽어가며 수도 없이 과거와 현재의 나를 들여다보았다. 나는 비겁했고 말도 안 되게 형편없었다. 부끄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