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홈스쿨을 시작했습니다.
막내는 말이 늦었다.
지금도 대화할 때 살짝 어색한 부분이 있어 가족의 놀림과 위로를 동시에 받는다.
말이 어눌한 이유를 굳이 찾으려 한다면 아마 아이가 어릴 적 아기말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것을 가족들이 지나치게 즐겼거나 TV 없이 생활하는 가족생활의 영향이 있었거나 엄마의 무뚝뚝한 말 걸기가 원인이 되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그래도 함께 장난치며 소란하게 놀던 언니들과 아이들과 대화하기 좋아하는 아빠의 영향은 어디로 간 건지 의아하다.
학창 시절 학교에서 별로 말이 없었던 부모와 역시 말이 늦었던 언니들의 유전적인 요인도 있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지만 이 역시 온갖 말을 해야 하는 나의 교사라는 직업과 토론대회에 나갔던 둘째와 4년 내내 고전을 읽고 토론만 하는 조금 특이한 대학에 진학한 큰아이를 보면 유전도 그다지 큰 원인이 되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홈스쿨을 생각하게 된다.
홈스쿨을 하면서 자신을 표현할 기회가 많지 않았으니 말의 발전을 방해한 죄를 홈스쿨에 적용하는 것이 맞는 듯하다. 학교에서는 친구들과 소통을 하고 학교에 적응하기 위해 좋든 싫든 말을 잘하기 위해 노력하게 되지만 홈스쿨을 하면 말로 자신을 표현하거나 소통을 위해 억지로 무언가를 할 필요가 없다. 조용한 성향이 강하면 조용한 생활을 하면 되고, 외향적인 성향으로 사람을 만나 말하기를 좋아하면 그런 상황을 만들어 생활하면 된다.
막내는 조용한 것을 좋아하고 약간은 내성적인 성향 때문인지 가족 외에는 말을 할 기회를 많이 가지지 못했다. 억지로 다 잘해야하는 에너지를 자신에게 맞는 환경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방식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가는데 썼다.
말이 늦거나 표현이 부족한 아이들은 학교에 적응하는 것이 힘들 거라며 부모나 교사, 전문가까지 입을 모은다. 그래서인지 부모는 입학 전에 아이들의 말하기 실력을 미리 늘려놓으려고 유치원에서부터 많은 애를 쓴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지내다가 처음 만난 아이들은 당연히 서로 다른 모습과 능력을 가지고 있다. 아이들의 첫 사회를 책임지는 학교는 이런 점을 충분히 고려하여 학생들 간의 장단점이 서로 잘 어울리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많은 아이들이 한 교실에 오게 되면 교사는 몇몇 아이들이 모델링이 되어 1학년의 평균 수준을 마음속으로 정하게 되고 그 기준에 맞추어 지도하게 된다. 교실에서 일반적이지 않은 아이들을 1대 1로 지도하기는 어려운 점이 많다. 그러기에 그 기준에 못 맞추고 다소 뒤처지는 아이들은 긍정적으로 부족한 점을 보충받기보다 자신을 표현하지 못해 자존감이 낮아지거나 자신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우리 막내도 그랬다. 말이 늦어서 일어나는 일들이 선생님의 편지 속에 담겨 나에게 부정적으로 전달되었다.
매일 알림장에 죄송합니다를 써야 하니 아이에 대해 다르게 알고 있는 나에게는 이게 뭐하는 것인가 하며 의아하기만 했다. 아이가 수업 중 어이쿠 하면서 우유를 쏟거나 급식을 제일 늦게 먹거나 화분에게 말을 걸었는데 친구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해서 화를 내고 책을 던졌다고 하는 편지를 받으면 어설픈 아이에게 화도 나고 마음도 아프다.
일단 장문의 편지에 선생님의 힘듬과 열정이 느껴져 죄송함의 극치를 달리며 머리를 조아렸다. 나의 교사관과 조금 다르지만 선생님께 빙의를 하며 이해해드리고 싶었다. 부족한 아이를 학교에 보낸 내가 마치 나의 동료 교사에게 죄를 짓는 것 같았다. 학교 등교하기 전에 아이에게 오늘 급식은 빨리 먹으라고 하거나 말로 못 당하면 참으라고 하거나 선생님께 설명할 자신이 없으면 말씀드리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나의 지나친 죄송함의 표현 때문인지 선생님은 정말로 아이가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하시고 친구들 앞에서 아이를 혼내거나 뒤로 나가 서 있게도 했다.
아이가 혼나는 모습에 힘을 얻은 아이들도 가세했다. 아이의 어설픈 행동이 선생님의 화를 부르고 반 아이들은 선생님의 행동을 보고 막내를 힘들게 하는 악순환이 시작되었다.
하교 후 조별로 자신의 주변 청소를 하게 하신 선생님은 각조의 조장을 정해 조장에게 검사를 받고 집으로 가는 룰을 정하신 것 같다. 아이가 청소를 다해도 조장은 임의대로 각자 준비한 미니 쓰레받기에 하나 가득 쓰레기가 차야 갈 수 있다고 했다. 아이는 엎드려 쓰레기를 모으러 교실 여기저기를 훑고 다녔다.
마침 선생님은 반 아이들을 하교시킨 후 연구실에서 잠시 숨을 돌리러 가셔서 인지 교실에는 조장과 아이만 남아있었다. 아무리 쓰레기를 모아도 이미 검사가 끝난 친구들이 쓰레기를 모두 치워버려 아이의 쓰레받기에는 쓰레기가 차지 않았다. 조장은 게다가 빨리하라고 소리도 치고 있었다. 선생님처럼.
밖에서 한참을 기다려도 나오지 않기에 교실에 들어가니 아이는 슬프게도 교실 바닥에서 먼지 사냥을 하고 있었다. 또박또박 야무지게 설명하는 조장 아이에게 자초지종을 듣고 연구실 문을 두드려 선생님을 뵈었다. 학교 밖에서 모처럼 아이를 기다리던 아빠는 선생님과 간단한 이야기를 마치고 조용히 아이의 짐을 꾸렸다. 그리고, 그 이후 아이는 학교에 가지 않았다.
모든 서류 절차는 선생님께 여전히 죄송하다며 머리를 조아리는 내가 맡아 진행했다.
1학년 때는 10%, 2학년 때는 20% 하며 평소에 아이들이 집에 가서 진실을 말하는 수치를 떠들던 내가 체육대회며 화장실에서 반 아이들과 있었던 일을 막내가 말할 때는 90% 이상을 공감하며 듣고 있었다.
나는 아이에게 제안했다. 집에서 행복하게 공부하는 것이 어떤지.
아이는 아쉬워하면서도 집에서 하는 것을 선택했다.
이로서 초등 1학년 막내의 홈스쿨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시작되었다.
우리 가족의 삶의 철학과 방식도 바뀌어야 했다.
오랜 시간 학교교육의 문제를 인지하고 고민하였고, 고등학생이었던 두 아이들의 홈스쿨 결정도 흔쾌히 받아들였지만 한때 초등학교 교사였던 내가 진짜로 초등학교 때부터 홈스쿨을 하는 일을 저지를 줄은 몰랐다.
약간은 두려웠지만 나와 우리 가족의 원래 모습을 찾아 떠나는 것 같아 한편으로는 후련한 마음도 들었다.
고등학교 때 홈스쿨을 저지른 두 언니들은 환영하면서도 홈스쿨의 어려움을 알아서인지 걱정하기도 했다.
핑크빛 홈스쿨만을 보는 것이 아니고 장단점을 함께 보고 결정하였기에 어쩌면 더 맘이 놓였다.
내가 결정한 것에 대한 책임과 어려움을 알고 넘는 것과 모르고 넘는 것과는 차이가 있을 것 같았다.
큰아이들과 다르게 부모의 결정이 많은 영향을 준 막내의 홈스쿨은 가족 모두가 함께 책임지고 서로 의지하며 가야 하는 또 다른 세상의 문을 열어주었다.
홈스쿨을 하면서 우리는 아이의 성격이나 자질을 조금씩 알아갔다. 아이가 가진 부분을 존중해야 함을 매일 느끼지만 솔직히 어떨 때는 아이를 존중하기는커녕 아이에게 함부로 말하기도 한다.
홈스쿨을 하기 위해서는 부모도 함께 성장하여야 하고 남과 다르게 살아가기에 대한 가치관을 매일 다져야 하지만 꾸물꾸물 올라오는 부모의 욕심 때문에, 자유로운 영혼인 아이를 이해하지 못해, 아이가 미래에 만날 현실의 벽을 생각하며 무너지기가 일쑤였다.
막내의 홈스쿨을 하면서 아직도 그릇이 차야되는 부족한 부모임을 알게 되었고 오늘도 다시 한번 반성의 편지를 쓰게 된다.
딸아 미안해. 엄마가 많이 부족하지만 사랑해.
오늘도 잔소리했지? 그만 음악 들으라고 귀가 빵구 난다고.
말할 때 좀 붙여서 말해. 하며 자존심을 박박 긁어대기도 했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홈스쿨은 엄마의 학교이기도 한단다. 너와 엄마가 함께 성장하는 학교.
더 노력할게. 열심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