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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가는 길은 늘 어렵다

바프와 함께 제주도로

153킬로미터! 첫날 자전거를 탄 거리다. 원래 계획했던 120킬로미터 지점인 적포교에서 숙박을 하지 않고 남지읍까지 가는 바람에 33킬로미터를 더 추가한 거리다.


자전거 여행에 주님께서 함께 하시기를 청하며 아침 미사를 봉헌하고 라면에 햇반으로 배를 든든히 채운 뒤 새벽 5시 45분에 출발했다. 아침 공기는 상쾌하고 바람은 시원했다. 놀라운 것은 그 시간에 강변에 나와 티를 시작하는 파크 골프인들이 엄청 많았다는 점이다. 나도 나이가 들면 하지 않을까.


6시 55분 동촌유원지 도착한 뒤 속도를 높여 오전 8시 30분 강정고령보에 도착했다. 자전거 국토종주 첫 도장을 찍었다. 이제 국토 종주 공식 인증이 시작된 것이다. 9시 30분에 달성보에 도착해 두번째 종주 도장을 찍고 편의점에서 달콤한 커피를 한잔 했다.



10시 30분 드디어 첫번째 고비인 다람재 고개가 나타났다. 아직 힘이 남아 있어서 고개 정상까지 내리지 않고 올라갔는데 얼마남지 않은 힘을 너무 많이 쓴 탓인지 지도를 켜 둔 핸드폰이 꺼졌다. 새벽부터 지금까지 나를 안내해 주던 가이드가 갑자기 사라진 것이다. 낭패였다. 다음 목적지인 합천창녕보에 가려면 꼭 거쳐야 하는 무신사라는 절이 있는데 비포장도로에 고개가 가팔라 자전거인들 사이에서는 반드시 우회해야 하는 코스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런데 핸드폰 지도가 없으니 어디서 우회를 해야 할지 알 수가 없게 되었다.


그렇게 무아지경 상태로 낙동강 종주길 푯말을 따라 가는데 갑자기 뒤에서 싱글 라이더가 내 옆에 붙었다. 무뚝뚝해 보이는 그 남자는 '합천창녕보에 가는지, 그리고 무신사를 거쳐 갈 것인지' 물었다. 내 속을 어떻게 그리 잘 아는가 싶어 놀라면서, '당연히 우회하고 싶은데 길을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그분이 "제가 안내할테니 따라 오시죠."하며 앞서 갔다. 날개 잃은 천사가 있다면 바로 내 앞에서 자전거를 타던 그 남자였을 것이다. 보통 말도 섞지 않는 남자들인데 먼저 다가와 (내 속 마음을 어떻게 알고는) 무엇이 필요한지 묻고 앞장서 에스코트까지 해 주다니, 도무지 이성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 부분이다.


그렇게 자전거 탄 천사의 도움으로 무신사를 우회해서 체력과 시간을 아끼고 합천창녕보에 도착했다. 인증 도장을 찍고 다시 홀로 오늘 목적지인 적포교로 향했다. 그곳에 있는 적교장 모텔에서 하루 묵을 계획이었다. 그런데 그곳에 도착하니 오후 12시 30분이었다. 먼저 서울식당에서 정식으로 점심을 먹으면서 핸드폰 충전을 하면서 생각했다. 오후 1시에 체크인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고난의 행군을 다시 나섰다. 무엇이든 너무 과하면 후회하는 법. 눈 앞에 나타난 고개가 예사롭지 않아 초반부터 자전거에 내려 끌바(핸들바를 끌고 간다는 뜻)를 시작했다. 그런데 그 고개는 가도 가도 끝이 없었다. 그제서야 도로 옆 벽면을 가득 채운 원망 섞인 수많은 낙서가 눈에 들어왔다. 정말 대갈이 빡치게 만드는 빡진고개(박진고개)에 대한 원망과 응원, 감동이 담긴 낙서 천지였다. '굴을 뚫어라'는 절규부터 '국토 종주의 꿈을 위해', '부모님 건강하세요', '박진고개를 빡시게 넘다!'라는 글귀까지 참으로 다양했다. 나 역시 끌바를 하며 끙끙거리며 낙서들에 모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르막은 언젠가 끝이 있는 법. 그렇게 박진고개를 오르고 나니 큰 고비를 넘겼음을 알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내리막, 정말 신났다. 인생이란 공평하다. 적어도 자전거 길에서는.


하지만 또 하나의 고비가 있었으니 '영아지 고개'였다. 영아지 마을로 들어서 가는데 마을회관 앞 정자에 앉아 계신 어르신들이 나를 불쌍하게 쳐다 보셨다. 저 많은 짐을 가지고 어떻게 영아지 고개를 오르려는지 안타까워하시는 표정이었다. 과연 영아지 고개는 눈앞에 서 있는 거대한 벽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벽을 오를 사람은 없으리라. 그저 고개를 묻고 계속 끌바를 하는 수 밖에. 왜 적교장 모텔에서 멈추지 않았는지 후회했지만 시간은 아직도 오후 3시밖에 되지 않았다.




누군가 처음 갔던 길을 이제 내가 처음 간다. 아무리 길이 좋아지고 표지판이 늘었어도 처음 가는 길은 늘 어렵다. 군대가 아무리 좋아져도 군대에 가는 젊은이들이 힘든 것처럼, 누구나 처음은 어렵다. 하지만 그 첫 걸음이 가져오는 체험은 어려움만이 아니다.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호기심이 커지고 만나는 모든 것이 주는 신선함도 처음 가는 길에 있다.


그리고 운이 좋으면 천사도 만날  있다. 천사 이야기를 했으니 천사의 주인이신 하느님으로 오늘 이야기를 마무리해야겠다. 오늘 오전은 내내 흐렸다. 자전거 타기에 더없이 좋은 날씨였다. 120킬로미터를 타는 내내 그분께서 햇볕을 손으로 가리고 있는  했다. 그리고 더해진 33킬로미터는 기다렸다는듯이 반짝이는 햇살을 듬뿍 내려 주시어 박진고개와 영아지고개의 체험을 배로 키워주셨다. 하느님은 사실 장마도 7 초까지 붙잡고 계신다. 내가 어서 제주도에 들어가야 장마가 시작될  하다. 이렇게  위주로 하느님 덕을 본다고 우스개 소리를 하는 것은 지금,  상태가 평소 같지 않은 까닭이니  글을 읽는 분들께서는 이해해 주시리라 믿는다.


남지읍 어느 호텔에서 이제 긴 하루를 정리하면서 기도한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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