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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 다시 제대로 걷기

영실-어리목 코스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 아직 어두운 5시에 한라산 영실로 향해 떠났다. 간단한 식사 후 6시 20분 영실을 오르기 시작한다.


영실은 석가여래가 설법하던 영산과 흡사하다하여 영실(靈室)이라 부르는 신비한 곳으로 그동안 말로만 들었던 아름다운 한라산 등반 코스다. 영실 탐방로 입구에서 윗세오름 대피소까지의 3.7킬로미터 구간은 그야말로 신세계라 할 만 했다. 눈앞에 펼쳐진 영실기암에는 전설이 있다.


영실기암


제주도를 만든 설문대 할망에게는 오백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이들에게 죽을 먹이기 위해 큰 가마솥에 죽을 끓이다가 실수로 솥에 빠져 죽게 된다. 집에 돌아온 아들들은 그 사실도 모르고 차려진 죽을 맛있게 먹었다. 하지만 뒤늦게 온 막내만이 어머니가 죽은 사실을 알고 어머니 고기를 먹은 형들과 살 수 없다 하여 차귀도에 가서 바위가 되었고, 나머지 499명의 형제는 한라산 영실로 올라와 '오백장군'이라고 불리는 영실기암이 되었다고 한다.


산을 오르며 뒤를 돌아보니 서귀포시가 한 눈에 들어오는 장관이 펼쳐졌다. 한라산 백록담으로 오르는 길에서는 볼 수 없었던 제주도의 새로운 모습이었다.


영실에서 바라본 서귀포시


조금 더 오르니 지구상에서 우리나라에만 자생하는 구상나무 군락을 만날 수 있었다. '살아백년, 죽어백년'이라는 구상나무는 싱싱하게 살아서도 멋있고 죽어서도 그 아름다움을 여전히 뽐내고 있었다.


구상나무 군락을 지나니 갑자기 넓디 넓은 평원이 펼쳐진다. 백록담 화구벽을 마주하고 펼쳐진 광활한 평원을 일컫어 제주어로 '돌이 서 있는 넓은 장소'라는 뜻으로 '선작지왓'이라고 부른다. 우리나라 최고의 산을 오르며 상상하지 못했던 광활한 평원을 맞이하니 이유없는 자유가 바람이 되어 다가온다.


선작지왓


오전 8시 윗세오름 대피소에 도착했다. 2.1킬로미터를 더 가서 남벽분기점을 거쳐 돈내코 코스로 내려갈 수도 있지만 나는 어리목 방향을 선택했다. 관음사로 백록담을 올라 성판악으로 내려온 것처럼, 영실을 올라 어리목으로 내려오는 한라산 탐방 코스는 서귀포시에서 올라 제주시로 내려가는 특별한 코스이기 때문이다.


4.7킬로미터의 어리목 코스를 내려가면서 펼쳐진 제주시 전경에 감탄사를 내뱉지 않을 수 없었다.


어리목에서 바라본 제주시 


오전 9시 30분 어리목 입구에 도착함으로써 3시간여의 이른 한라산 영실-어리목 산행이 끝났다. 백록담으로 가는 길보다는 확실히 짧았지만 영실기암, 구상나무 군락, 선작지왓, 그리고 무엇보다 서귀포시와 제주시를 다같이 한눈에 조망함으로써 제주도를 제대로 만날 수 있었다.


제주도를 제대로 보고 싶은 누구에게나 영실-어리목 코스를 추천하고 싶다.


집으로 오는 길에 관음사에 잠시 들렀다. 유명한 비구니가 창건한 제주도에서 가장 큰 절을 한번은 가보고 싶었다. 일주문을 지나 대웅전으로 들어가는 길에 양 옆으로 늘어선 돌부처님들이 경건히 맞아준다. 관음사는 한라산이 품어 안은 절 같다.


관음사 입구


한라산은 제주도 사람에게 강인한 어머니다. 보통은 한없이 부드럽게 보이지만 때론 우뚝 솟은 강인함 또한 잊지 않는다. 모든 제주도 사람이 어디서든 바라볼 수 있는 어머니 한라산은 언제나 섬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모든 것을 알면서도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인내해 왔다.


한라산을 걸으며 어머니의 눈이 어떻게 제주도 사람을 바라 보는지,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알 수 있었다. 잠들지 않는 남도의 어머니, 오늘 밤은 편히 쉬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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