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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경계에 서다. 세상과 구분 짓는 나.

2부: 공간의 속삭임


나는 이 집 거실 창문을 장식하는 커튼이다. 낮에는 활짝 열려 밝은 햇살을 맞이하고, 밤이 되면 조용히 닫혀 가족의 사생활을 지키는 것이 나의 역할이다. 나는 이 집의 안과 밖을 구분 짓는 부드러운 경계선이다.

매일 아침, 주인이 다가와 나를 양옆으로 젖힌다. 그 순간 나는 설렘과 동시에 약간의 부끄러움을 느낀다. 밤새 어둠 속에 숨겨두었던 집 안의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은 언제나 조금은 수줍은 일이다.



자, 오늘도 좋은 하루 시작해 볼까?



주인의 말과 함께 나는 옆으로 물러나고, 밝은 햇살이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그 빛 속에서 가족들의 하루가 시작된다. 나는 그들의 분주한 아침 풍경을 지켜보며 미소 짓는다.

봄이면 나는 꽃향기를 걸러내는 필터가 된다. 창밖 벚나무에서 날아오는 꽃잎들을 살며시 막아내면서도, 그 달콤한 향기만큼은 살짝 들어오게 한다. 여름에는 강렬한 햇살을 적당히 가려주는 파라솔이 되어준다. 가을이면 단풍으로 물든 하늘을 액자처럼 담아내는 프레임이 된다.

그리고 겨울, 내가 가장 바쁜 계절이 찾아왔다. 어느 날 아침, 나는 평소보다 일찍 깨어났다. 창 밖에서 무언가 하얗게 날리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첫눈이었다. 가족들에게 이 황홀한 풍경을 보여주고 싶어 나는 안절부절못했다.






아침이 밝았어. 모두 빨리 일어나세요~ 밖에 눈이 내리고 있어요.



바람에 살랑거리며 소리 없는 외침을 했지만, 아무도 듣지 못했다. 평소라면 이맘때쯤 일어나 나를 걷어내고 새날을 맞이하는 가족들이 오늘따라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얼른 나를 걷어 젖히고 치고 눈 내린 아름다운 풍경에 설레세요. 얼른 일어나세요. 오늘따라 왜 이리 늦잠들이에요."

답답한 마음에 나는 더 크게 흔들거려 보았다. 창틈으로 들어온 찬 공기가 내 몸을 흔들었지만, 그마저도 소용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나는 조바심이 났다. 이대로 첫눈의 마법 같은 순간을 놓치게 될까 봐 안타까웠다.


드디어 아이방에서 부스스한 머리를 한 꼬마가 나타났다. "와, 눈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는 살며시 옆으로 물러났다. 꼬마의 환호성에 다른 가족들도 하나둘 모여들었다. 그들의 감탄사 속에 나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세상과 이 가정을 이어주는 나의 역할이 다시 한번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내가 열릴 때마다 느끼는 감정이 단순히 기쁨만은 아니다. 가끔은 두려움도 느낀다. 내가 열리면 집 안의 모든 것이 밖에서 보이게 되니까. 혹시 누군가 사생활을 들여다보지는 않을까? 이 가족의 소중한 일상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에 나는 긴장하게 된다.





괜찮아, 내가 지켜줄게.



나는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필요하다면 언제든 재빨리 닫혀 이 가족을 보호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낮 동안 나는 부드럽게 흔들리며 바깥세상의 모습을 감상한다. 창 밖으로 보이는 나무들, 지나다니는 사람들, 때로는 날아다니는 새들. 이 모든 것들이 나의 일부가 된다. 나는 이 집의 눈이 되어 세상을 바라본다.



특별한 날들도 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아이들이 내 몸에 반짝이는 전구를 달아준다. 생일 파티가 열리는 날이면 풍선으로 나를 장식한다. 그럴 때면 나는 이 가족의 행복한 순간을 더욱 빛나게 해주는 조연이 된 것 같아 행복하다.


하지만 늘 기쁜 날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가끔 가족들이 다투는 날이면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그들의 언쟁을 지켜봐야 한다. 아픈 가족이 있어 모두가 걱정에 잠긴 날이면, 나는 최대한 부드러운 빛을 들여보내려 애쓴다. 슬픔도 기쁨도 모두 이 가족의 일부니까.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리면 나의 또 다른 임무가 시작된다. 주인이 다가와 나를 천천히 닫으면, 나는 이 집의 수호자가 된다. 밤이면 나는 달빛을 은은하게 걸러내어 가족들의 편안한 잠자리를 지켜준다.



가끔은 내 역할에 대해 고민에 빠지기도 한다. 나는 과연 장벽인가, 아니면 다리인가? 세상과 이 가족을 분리하는 것인가, 아니면 연결하는 것인가? 이런 생각이 들 때면 나는 혼란스러워진다.

그러던 어느 날, 이제 숙녀가 된 큰 딸이 창가에 서서 나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이 커튼이 있어서 참 좋아. 내 마음대로 세상을 열었다 닫았다 할 수 있으니까."

그 말을 듣고 나는 깨달았다. 나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이 가족과 세상을 이어주는 중요한 매개체라는 것을. 


나는 이 가족의 수많은 순간들을 함께했다. 기쁜 날에는 활짝 열려 그 기쁨을 세상과 나누었고, 슬픈 날에는 꼭 닫혀 그들을 위로했다. 나는 그들의 웃음소리, 울음소리, 대화 소리... 그 모든 순간이 나의 살갗에 고스란히 묻어있다.


이제 나는 안다. 내가 수줍어하며 열리고 닫히는 모든 순간이 이 가족의 인생이라는 것을. 계절이 바뀌고, 날씨가 변하고, 시간이 흘러가도 나는 여기 이 자리에서 변함없이 그들과 함께할 것이다. 나의 수줍음은 단순한 약점이 아니라 이 가족을 지키고자 하는 사랑의 표현이라는 것을.



나는 커튼이다. 


세상과 이 가족 사이의 부드러운 경계이자 따뜻한 매개체다. 때로는 수줍게, 때로는 담대하게 나의 역할을 다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 자신의 가치를 발견한다.

오늘도 나는 이 자리에서 새로운 하루를 맞이한다. 아침이 오면 수줍게 열려 밝은 빛을 맞이하고, 밤이 오면 조용히 닫혀 이 가족을 지킬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순간 속에서 나는 행복을 느낄 것이다.

나는 이 집의 커튼이다. 수줍지만 강인하게, 나의 자리를 지키며 이 가족의 일상을 함께 만들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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