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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동희 Aug 03. 2024

환갑을 넘어 떠난 구법여행 '법현'

간다라 이야기 #31

인도에서 시작된 불교는 간다라, 서역을 거쳐 먼 길을 돌아 돌아 중국 그리고 우리나라에 전해졌다. 이미 부처님이 돌아가신 후로부터 대략 500~800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전파는 과정에 오랜 세월이 흘렀고, 다양한 문화권을 거치면서 불교의 철학과 교리는 여러 차례 재해석을 거쳤다. 어떤 부분은 누락되었고 또한 어떤 부분은 와전되었다. 중국과 한반도에서 불교를 공부하던 승려들은 불명확한 가르침에 의문점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많은 승려들은 답답함을 극복하기 위해서 불교의 발상지, 인도로 떠났다. 법을 찾아 떠난 이들을 '구법승(求法僧)'이라 부른다.


얼마나 많은 구법승들이 인도로 향했는지는 알 수 없다. 험하고 먼 길이었기에 돌아온 승려들보다 돌아올 수 없었던 승려들이 훨씬 많았다. 돌아온 승려들 중에서도 운 좋게 기록이 남겨진 자들에 한해서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알려진 구법승으로 '법현(法顯, 337~422)', '현장(玄奘, 602~ 664)', '의정(義淨, 635~713)', '혜초(慧超, 704~787)'를 꼽을 수 있다. 이들 중 의정은 바닷길로 왔다 갔기에 서북 내륙에 위치한 간다라에는 들리지 않았다. 이에 간다라를 다녀간 세 명의 구법승 1) 법현, 2) 현장, 3) 의정에 대해서 차례로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노승 법현 법을 찾아 모험을 떠나다


399년 중국 동진의 승려 법현(法顯, Faxian, 337~422) 환갑이 지난 62세의 나이로 구법여행을 떠났다. 조선시대만 하여도 환갑이라 함은 마을에서 큰 축제를 열 정도로 장수하였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의정이 환갑을 지나 인도로 도보 여행을 떠난 것은 지금으로부터 1,600년 전의 일이었기에 더더욱 놀라운 사실이다. 도대체 무엇이 이 노승을 떠나게 만들었을까?


구법 여행을 떠나는 법현의 스케치(Chat GPT)


법현의 여정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열풍이 부는 사막길에 행선지를 잃고 무작정 걸어가 마주친 죽은 사람의 마른 뼈가 자신의 미래가 될 것같은 불안함. 폭풍우를 만나 항로를 잃고 도착했어야 할 시간이 지났음에도 육지가 보이지 않아 소금물을 마실 수밖에 없었던 초조함은 그의 여행의 모든 순간같이했었다.


사하에는 악귀(惡鬼)와 열풍(熱風)이 많아 이를 만나면 모두 죽고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다. 위로는 날아가는 새도 없고 아래로는 달리는 짐승도 없었으니, 아무리 둘러보아도 망망하여 가야 할 길을 찾으려 해도 가 야 할 곳을 알 수 없었다. 오직 죽은 사람의 고골(枯骨)만이 표지가 될 뿐이었다. - 법현의 '불국기' 중에서


법현은 399년 장안을 출발하여 실크로드를 따라 둔황, 고비사막을 지나 카슈가르와 호탄을 건너 간다라에 이르렀다. 그리고 란다와 파탈리푸트라 등 인도 마가다 왕국의 여러 도시를 방문하였다. 인도를 여행하며 산스크리트어를 배우고, 불전과 불적을 수집했다. 소승과 대승을 가리지 않고 이야기를 들었다. 귀국길에는 스리랑카에 들러 2년간 머무르며 스리랑카의 불교를 배웠다. 귀국길은 바닷길을 통해서 수마트라와 자바를 경유하여 413년 중국으로 돌아왔다.


사실 돌아오는 길도 위험천만했다. 원래라면 중국 남부의 광저우를 목표로 항로를 잡았는데, 풍랑에 휩쓸려 훨씬 북쪽인 청주에 도달했다. 조금만 방향이 틀어졌다면 한반도에 도착할 뻔도 했다. 법현의 기록에 의하면 50일이면 광저우에 도착해야 하는데, 여러 날이 지나도 육지가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바닷물을 끓여 밥을 지어먹으며 식수를 아꼈음에도 식수가 바닥이 났었다고 기록했다.  

법현의 여행로



고생이 많았던 만큼 성취가 컸던 여행


법현의 여행이 남긴 의미는 크다. 우선 법현의 '불국기(佛國記, Foguoji)'는 구법승이 남긴 가장 오래된 여행기로 5세기 초의 인도와 인도 주변국의 모습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법현 이후에 천축국에 온 현장도 많은 기록을 남겼지만, 법현으로부터 거의 2세기가 지난 시점이었다. 아마도 법현이 보고 들은 것을 더 이상 볼 수 없었던 것들이 많았을 것이다. 특히 간다라 지역이 융성했던 시기를 목격하고 기록한 것은 법현이 유일하지 않나 싶다.(다음 편에서 이야기할 현장의 대당서역기에서 의외로 융성했던 간다라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일부 과장이나 거짓이 포함된 것이 아닐까 싶다.)


또한 불국기는 가장 오래된 구법여행에 대한 기록이었던 만큼 후배 구법승들의 여행 지침서가 되었다. 육로를 통해 천축으로 갔다가 해로를 통해 돌아왔기에 훗날 육로를 통해 갔다가 육로로 돌아온 현장, 해로를 통해 갔다가 해로로 돌아온 의정, 해로로 갔다가 육로로 돌아온 혜초 모두에게 법현의 여행은 참고가 되었다. 법현의 불국기는 '법현전', '고승 법현전', '법현법사전', '역유천축기전' 등의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



법현이 다녀간 간다라


법현의 기록을 살펴보면 간다라 지역에 대한 짧은 기록이 등장한다. 아무래도 천축으로 향하는 길의 기록이기에 기록이 상세하지는 않지만, 5세기초 간다라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매우 중요한 사료이다. 불국기 중에서 간다라와 관련된 주요 부분들만을 발췌해서 살펴보자.


하안거를 끝내고 남쪽으로 내려와 숙가다국(宿呵多國)에 이르렀다. 이 나라 역시 불법이 성했는데 옛날 천제석(天帝釋)이 보살을 시험해 보기 위하여 매와 비둘기로 화현하여 쫓고 쫓기고 있었는데 보살이 자기 살을 잘라 비둘기를 살려 준 곳이 있다. 그 뒤에 석존께서 성도하시고 여러 제자들과 함께 유행(遊行)하셨을 때 “이곳은 본래 내가 살을 잘라 비둘기를 살려 준 곳이니라.”고 하셨다고 한다. 그 래서 이를 기념하기 위해 이 나라 사람들이 여기에 탑을 세우고 금ㆍ은으로 꾸몄다.

이 기록에서 등장하는 숙가다국은 북부 간다라에 해당하는 스왓(Swat) 지역이다. 비둘기 무게에 해당하는 살을 내어준 부처님의 이야기는 대표적인 부처님의 본생담인데, 그 배경이 스왓지역이라고도 전하고 있다.


여기서 동쪽으로 5일간 가서 건타위국(揵陀衛國)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아육왕(阿育王:아소카왕)의 아들 법익(法益)이 통치하던 곳이다. 부처님께서 보살로 계셨을 때, 또한 이 나라에서 당신의 눈을 남에게 보시하셨다고 한다. 그곳에도 역시 큰 탑이 세워지고 금ㆍ은으로 꾸며져 있었으며 이 나라 사람들 대부분이 소승을 배우고 있었다.

이 기록에서 등장하는 건타위국은 간다라를 지칭한다. 아육왕의 아들의 이야기, 눈을 보시한 이야기는 쿠날라 왕자 이야기이다. 시르캅의 뒷 언덕에 쿠날라 왕자를 위해 만들어졌다는 쿠날라 스투파에 해당하는 이야기로 보인다. [1화. 슬픈 눈의 '쿠날라' 왕자 이야기 참조]


고대도시 시르캅(사진 상단)을 내려다보고 있는 쿠날라 스투파


이곳에서 동쪽으로 7일쯤 가자 축찰시라(竺刹尸羅)라고 하는 나라가 있었는데 축찰시라란 중국어로 머리를 자른다는 뜻이다. 부처님께서 보살로 계실 때 여기에서 머리를 남에게 보시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이런 이름을 갖게 된 것이다.

이 기록의 부분은 탁샤실라를 말하는 것이 명확하다. 여기서 머리를 잘라 보시한 이야기의 배경은 발랄톱 스투파에 해당한다. [2화. 탁실라의 등대 '발랄톱 스투파' 참조]


발랄톱 스투파


다시 동쪽으로 이틀쯤 가면 몸을 던져 굶주린 호랑이에게 먹인 곳에 이르게 된다. 이 두 곳에도 큰 탑이 세워져 있었고 모두 갖가지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었는데 여러 나라의 왕과 신하들은 다투어 공양을 올렸고 꽃을 뿌리고 등을 켜는 것이 계속 이어져 끊이질 않았다. 앞의 두 탑과 함께 그 지방 사람들은 이를 사대탑(四大塔)이라고 하였다.

이 기록은 살타태자 이야기로 이슬라마바드 남쪽의 만끼알라 스투파와 관련된 이야기이다. [4화. 굶주린 어미 호랑이 '망키얄라 스투파' 참조] 스왓의 스투파, 쿠날라 스투파, 발랄톱 스투파와 만끼알라 스투파를 일컬어 당시에 사대탑이라고 칭했던 모양이다.


만끼알라 스투파


건타위국에서 남쪽으로 나흘쯤 가자 불루사국(弗樓沙國)에 이르렀다. 옛날 부처님께서 여러 제자를 데리고 이 나라에 유행(遊行)하실 적에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그러한 마음을 계발하고자 소를 치는 목동[小兒]으로 몸을 나투어 길가에서 탑을 쌓고 있었다. 그러자 왕이 물었다. “너는 무엇을 만들고 있느냐?”, “불탑을 만들고 있습니다.” 왕이 말했다. “매우 훌륭하구나.” 그리고 왕은 곧바로 소년이 만든 탑 위에 다시 탑을 세웠는데 높이가 40여 장이나 되었으며 갖가지 보석으로 장식되었다. 무릇 경에서 본 탑묘(塔廟) 중에서 이 탑만큼 아름답게 장엄되고 위엄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염부제(閻浮提)의 탑은 오직 이 탑이 최상(最上)이라고 했다.

이 기록은 페샤와르를 지칭한다. 여기서 말하는 세상에서 가장 높은 탑은 지금은 사라져버린 카니슈카 대탑을 지칭함이 틀림없다. 당시 간다라에서는 페샤와르의 카니슈카 대탑을 가장 높게 치고, 앞서 이야기한 네 개의 탑을 다음으로 친 듯하다.



재조명의 가치가 큰 법현의 삶


법현의 여정의 일대기를 되살펴 보면, 그는 수명이 훨씬 늘어난 현대 사회에서 반드시 재조명해야 할 인물이다. 다시 말하지만 그가 여행을 시작한 나이는 62세로 환갑이 지난 나이였다. 현대에야 환갑도 아직 한참이라고 말하지만 당시에 환갑이란 곧 죽음을 맞이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었는데, 그런 나이에 도보로 인도로 향한 것이었다.


그가 삶을 생각하는 태도는 여행 이후의 행보를 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그는 인도에서 새롭게 산스크리트어를 배웠다. 또한 14년의 긴 여정을 마치고 중국으로 돌아온 뒤, 여행기를 써내었다. 그리고 10년 뒤 입적에 이르기까지 스스로 가져온 경전들을 직접 번역했다.

 

법현은 어린나이에 출가한 스님이었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를 높게 평가하는 주요 업적은 환갑 이후에 이룬 것들이다. 그의 삶에 대한 태도는 '이미 이 나이에 새로 뭘 하겠어?' 라며 도전에 주저하는 우리에게 경종을 울린다.



참고자료

동국대학교 한글대장경, '고승법현전 K.1073(32-749)', [Link]

이주형 외, "동아시아 구법승과 인도의 불교유적", 사회평론, 2009

Tansen Sen, 'The Travel Records of Chinese Pilgrims Faxian, Xuanzang, and Yijing', "Education about Asia", Volume 11, No.3, 2006

Dorothy C. Wong and Gustav Heldt eds., "China and Beyond in the Mediaeval Period: Cultural Crossings and Inter-Regional Connections." Amherst and Delhi: Cambria Press and Manohar,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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