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복권명당 02화

비 오는 날

by 김승일

아침에 눈을 뜰 때 기분 좋은 순간이 있다. 기분 좋은 이불의 감촉. 그리고 방 안의 기압이 딱 적당하다고 느끼며 창문 바깥의 바람 세기를 가늠해본다. 길바닥이 젖었을 때 나는 냄새가 느껴지는 것 같다. 역시. 비가 온다. 나는 비가 오는 날을 좋아한다. 물방울이 창문을 두들기는 소리, 세상이 젖은 냄새, 우중충한 날씨, 방 안이 더 차분해지는 것 같은 느낌.


오늘은 왠지 책도 차분하게 읽을 수 있을 것 같고, 친구랑 못 나눴던 추억 얘기도 도란도란 할 수 있을 것 같다. 씻으면서 오늘 입을 옷을 곰곰이 생각해본다. 입고 싶었던 옷을 입자니 비가 닿아 젖을 것 같고, 신발도 물에 취약한 놈들은 미리 후보에서 제쳐둔다. 그렇게 빼고 나니, 옷장에서 가능한 연출이 몇 없다. 오늘은 과감하게 믹스&매치를 시도한다. 평소 정해놓은 옷의 짝들을 떼서 내가 내키는 대로 집어 입어 본다. 생각보다 괜찮다. 아침부터 나가는 발걸음이 가볍다. 상가 유리에 비치는 내 모습을 주기적으로 확인한다.


막상 나와 보니까, 바람이 너무 강하다. 비 오는 날씨를 고려해서 세련되게 스타일링 해놓은 옷가지들이 제멋대로 나부끼며 물방울을 나서서 맞는다. 갑자기 비 오는 게 싫어진다. 태풍이 아니라고 했는데, 바람이 왜 이리 세지. 우산을 부여잡고 간신히 비바람 속에 몸을 웅크리고 걷는다. 저 앞에 사거리가 있다. 내 얕은 경험에 비추어 봤을 때, 사거리에서는 바람이 매우 강력하다. 한숨 고르고 앞에 가는 여자를 정찰대삼아 바람의 세기를 예측해본다. 앞에 가는 정찰대의 우산이 한 방에 뒤집어진다.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전개에 웃음이 나온다. 그리고 속으로 ‘휴, 내 우산은 멀쩡하다. 다행이다.’ 사거리에서는 바람의 간섭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우산을 꼿꼿이 들어야겠다고 전략을 세운다.


전략을 실행하기도 전에 앞의 정찰대를 부숴버린 바람이 내 우산을 가소롭다는 듯이 쐑 뒤집고 지나간다. 내 우산은 아예 뒤집어진 지경을 넘어서서 우산 대의 살이 여기저기 잔인하게 튀어나왔다. 이번에도 전혀 예측하지 못한 상황이다. 더 웃겨서 크게 웃는다. 근데 옷 스타일링이 더 망가진다. 안전지대로 뛴다. 뛰면서도 웃는다. 처마 밑에 겨우 몸을 숨긴다. 이미 상의는 물에 흠뻑 젖어 색이 진하게 변했다. 바지와 신발은 이미 내가 원하는 품위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갑자기 은근한 짜증이 밀려온다. 그러고 보니, 어제 머리를 털다가 거울 옆 옷장 손잡이 부딪혀 오른손 중지가 찢어졌던 일이 생각난다. 되는 게 없구나. 무슨 낭만이냐. 핸드폰 속 채팅창들의 밀린 대화 내용을 읽지도 않고 클릭해서 넘겨버린다. 비 오는 날이 싫다던 사람들이 갑자기 떠오르고, 그들을 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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