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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트. 본투비 캡틴아메리카 vs본투비 갓 태어난 기린

첫째들이 유독 체력이 좋은 것 같다는 킹리적 갓심에 대해.

by writer Lucy

난 우리 집의 둘째이자 막내로 태어났다. 위로 두 살 차이 나는 언니가 한 명 있는데, 언니와 나는 외모도 성격도 취향도 거의 정반대이지만 그중 가장 다른 것은 바로 체력이다. 내가 ‘캡틴 아메리카’라고 자주 놀리곤 하는 언니는 변화무쌍한 계절에 별 영향을 받지 않고 1년 내내 잔병치레 한번 없을 정도로 튼튼하고 체력이 좋다. 목소리는 우렁차고 몸이 단단하며, 별다른 운동을 하지 않는데도 푸시업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연속으로 할 수 있다. 걸음 속도는 웬만한 사람 달리기 속도만큼 빠르며 여행이든 밤샘이든 지친 모습을 생전 본 적이 없다. 반면 나는 어렸을 때부터 잘못 넘어져 뼈가 몇 번 부러진 적도 있고(심지어 똑같은 위치를!), 메르스와 코로나 등 유행하는 바이러스는 죄다 거쳤으며 조금만 더우면 얼굴이 시뻘게지고 조금만 추우면 한랭 두드러기가 돋아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다. 소설 작가가 일부러 작정하고 캐릭터 설정을 해도 이렇게 한 사람에게 몰빵을 하진 않았을 텐데, 체력적인 요소에서는 뭐 하나 언니에 비할 수 없는 게 처음에는 너무 분하고 억울하고 짜증 났다. 운동을 시작한 후 내 체력을 명백히 파악할 수 있게 되니 그 간극이 더 피부로 와닿게 느껴졌고, 힘껏 운동해도 언니의 타고난 체력을 넘볼 수 없는 게 한스럽고 원통했다. 한 번은 ‘천국의 계단’이라 불리는 운동기구 스텝밀을 ‘갓 태어난 기린’ 마냥 후들거리며 타다가 언니 생각에 벌컥 화를 낸 적도 있었다. “이렇게 힘들게 타봐야 언니한테 쨉도 안되는데 이게 무슨 소용이야!!!!!”


나를 더욱 기가 차게 만들었던 건 바로 점점 커가는 조카의 모습을 보면서였다. 갓 2살이 된 내 (사랑스럽고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것 같은 지구최강 귀염둥이) 조카는 이제 막 안정적으로 뛰어다닐 수 있게 되었는데, 이 아이의 왕성한 식욕과 활동량은 말하기 입 아플 정도다. 일단 앙증맞은 입으로 성인 기준 밥 한 공기와 요플레 2개를 먹고 과일과 과자를 먹어줘야 한 끼 식사가 끝난다. 하루에 네댓 번은 산책을 해야 하며, 이렇게 소진된 체력은 단 30분 낮잠으로 풀 충전된다. 끊임없이 블록 놀이와 달리기, 붕붕차 놀이, 오토바이 타기를 번갈아 해도 지치지 않고 사골곰탕을 끓이는 솥단지를 자기 혼자 두 손으로 들고 옮기며 노는 친구다. 한 달에 몇 번씩 우리 집에 오기에 조카와 노는 시간이 잦은데, 산책하다가 갑자기 “이모 뛰어!!!”하면 무조건 같이 뛰어야 한다. 안 그럼 관장님보다 더 매서운 어조로 계속 “뛰어! 뛰어!”하고 재촉하기 때문.


이 아이의 체력은 대체 누구로부터 왔을까,를 고민했을 때 당연히 언니로부터 나오지 않았을까 생각하다 희한한 공통점을 발견했다. 언니도 첫째고, 형부도 첫째고, 조카도 첫째이기 때문. 형부 역시 체력이 남다른데, 형부는 9 to 8로 6일간 일을 하고 일요일 새벽 친구들과 6시간에 걸쳐 설악산 정상을 등반해 나를 기함하게 만든 적이 있다. 나는 9 to 6로 5일 근무하면서 2일 재택근무까지 해도 항상 퇴근 후에 혼이 나가있었는데, 형부는 몸을 많이 쓰는 일을 하는 데다 등산이나 운동도 거의 한 적이 없었는데 말이다. 이 공통점에 주목하여 주변 사례들을 살펴보며 이 심증은 거의 확증이 되기 시작했다. 친한 언니 중 한 명 역시 집에서 첫째인데, 이 언니의 체력도 어마무시하다. 근 2년간 새벽 야근을 밥먹듯이 하면서 출근 전 수영을 가고 퇴근 후엔 필라테스나 유도를 했다. 오죽하면 ‘언니가 중간에 기절 안 한 게 너무 신기하다’고 얘기할 정도였다. 뭘까, 이 관계성은. 정말 첫째들은 둘째만 모르는 특별하고 영험한 육체적 기운을 물려받는 걸까. 추측에 불과하지만 차라리 과학적 이론이었으면 좋겠다 싶다.


그렇다고 운동을 멈출 순 없었다. 일단 상대적 박탈감 때문에 주저앉아 있으면 나는 계속 갓 태어난 기린처럼 후들거리는 체력이나마 겨우 유지하며 살 것이고 이건 결코 나에게 좋은 일이 아니다. 둘째로 내가 체력을 키워서 언니랑 겨뤄야 하는 것도 아니거니와(저희 자매는 아주 사이가 좋습니다) 언니의 체력을 보며 자극을 받기도 하니 말이다. 마지막으로 점점 운동을 하면 할수록 체력이 향상되는 게 느껴질 때가 잦아졌다.(물론 2살 조카와 함께 달리기를 할 때 말이다.) 이대로라면 언젠가는 첫째들 못지않게 강한 둘째로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 운동 수행 능력은 어떨지 몰라도 운동으로 키울 수 있는 집중력이나 정신력은 내가 더 강해질 수도. 하하하.


처음에 조카를 안았을 때, 솔직히 팔이 후들거려 죽는 줄 알았다. 8kg 남짓 되었던 아이의 따뜻한 체온과 아가 특유의 우유 냄새가 폴폴 나는 그 자그만 몸을 계속 안고는 싶은데 뻣뻣해진 팔이 이러다 나 죽는다고 곡소리를 하기에 어쩔 수 없이 언니에게 안겨줘야 할 때는 아쉬워서 눈물이 찔끔 나왔다. 최근 조카는 엄마와 내가 노래를 부르던 체중 12kg를 달성했는데, 50kg 데드 리프트와 양손에 12kg씩 쥐었던 바벨로 이제 지난날처럼 아쉽지 않을 만큼 안아줄 수 있게 되었다. 어찌 보면 운동의 가장 큰 성과는 그것이었을지도. 앞으로도 운동은 꾸준히 해나갈 것이다. '캡틴 아메리카'는 넘보지 못하더라도 두 다리로 단단하게 서는 튼튼한 기린 정도는 될 수 있지 않을까. 그것만으로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발맞춰 걷기엔 충분할 것도 같다.


손 잡고 헐레벌떡 조카 발걸음 쫓아가는 중


Back in the days 6.

걷기로 우울감 해소하기

별 다섯 개 만점에 네 개, “언제 어디서나 가질 수 있는 나만의 시간”

장점: 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다. 은근히 체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 생각이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돕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 같은 동네를 걸어도 새로운 길이나 가게, 풍경 등을 마주할 수 있다. 준비물이나 비용도 필요 없다.

단점: 매번 비슷한 길로 걷다 보면 약간 질릴 수 있다. 계절을 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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