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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세트. MBTI J형의 운동이란

집착과 성실 그 어딘가.

by writer Lucy

요즘 어딜 가나 MBTI 얘길 빼놓고는 스몰 토크에 낄 수가 없다. 인간의 성격 유형을 16가지로 나눈 이 모형은 누군가에겐 자신을 좀 더 깊게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단서로, 누군가에겐 나의 성격을 단정 지어버리는 올가미로 작용하며 명확한 장단점을 보여줬다. 개인적으로 나에겐 긍정적인 영향을 더 많이 주었던 것 같다. ‘대체 나는 왜 이러는 걸까’에서 수많은 ‘이런 것들’을 보듬어 안을 수 있게 되었고, 매번 연락만 하면 누워있어서 가끔은 화로, 가끔은 본질적 의문으로 궁금해했던 친구의 MBTI를 듣곤 ‘아, 그냥 쟤는 타고나길 그런 성향이구나’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데도 MBTI가 큰 역할을 했다. 심리학자 칼 융이 제시했던 외향적/내향적 기질을 좀 더 발전시켜 (무려) 일반인 모녀가 고안해 낸 이 전통 있는 검사는 앞으로 몇 년간은 더 유행할 성싶다.


내 MBTI를 전부 공개하기는 좀 그렇지만, 난 십여 년 이상 끝자리를 J로 유지하고 있는 J형 인간이다. J는 직관형(P)/계획형(J) 중 계획형을 의미하는 글자로, 어떤 일을 할 때 직관이나 즉흥적인 감상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닌 철저한 구상과 계획에 근거해 행동하는 사람들을 대표한다. 하지만 MBTI를 이야기하다 보면 맨 끝자리가 J형인 사람들에 대한 선입견 아닌 선입견을 엿볼 수 있는데, 예를 들면 “내가 아는 J형은 퇴근하고 나서 지하철 타는 시간, 내리는 위치도 다 계산하고 집에 가서 운동은 몇 분하고, 책을 몇 페이지를 읽고 샤워를 몇 분 한 후에 잠에 몇 시쯤 들어야지를 다 정하고 산다는데 너도 그래?”라는 질문을 받는 식이다. 이에 대한 답을 먼저 얘기한다면 “아니오.”다. MBTI의 유형을 정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비율이고, J 성향의 비율이 압도적인 사람은 그럴 수 있지만 나는 아니란 말이다. 난 여행도 큰 틀만 짜고 그날 계획은 즉흥적으로 바꾸는 편이고 책은 잠을 좀 늦게 자더라도 읽고 싶은 만큼 읽는다.(만일 여기까지만 읽기로 예정된 페이지에 말도 안 되는 반전의 실마리가 있다면 어떻게 잠을 이루겠냔 말이다!) 지하철은 지각을 걱정할 수준이 아니라면 아무 데나 서고, 퇴근 후에 갑자기 삘 받아서 홀로 KTX 타고 지방에 간 적도 꼽을 손가락이 모자랄 정도로 많다.(심지어 가방도 안 가지고 가서 편의점에서 산 양치도구만 든 비닐봉지를 달랑거리며 간 적도 허다하다.) 결국 MBTI가 얘기하는 건 한계가 있다 이 말이다.


하지만 반박할 수 없는 딱 하나가 있다. 흔히 P형과 J형을 한 번에 가르기 쉬운 질문으로 자주 나오는 얘기인데, ‘계획이 틀어졌을 때 화가 나냐, 안 나냐?‘하는 문제다. 나는 다른 건 다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이 질문에는 운동하는 장면이 떠오르며 ‘안 난다!‘고 명쾌하게 대답을 하기가 망설여졌다. 운동 할 때의 나는 완전히 J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나는 항상 크게 warm up 스트레칭-근력 운동-유산소 운동-relax 스트레칭을 루틴으로(루틴이라니! 이미 P는 물 건너갔다) 운동을 하는데, 이 순서가 흐트러지거나 예정했던 것들을 하지 못하면 처음엔 거슬리고, 그다음엔 짜증이 나고, 가끔은 화도 난다. 스트레칭도 음악을 듣거나 다른 사람이랑 대화를 하다가 해야 할 횟수를 세는 게 헷갈리면 그냥 처음부터 다시 하는 게 마음이 편하고, 요가 매트에 자리 잡고 앉아 핸드폰을 보는 누군가 때문에 스트레칭해야 할 타이밍을 놓치면 다리를 덜덜 떨면서 기다리더라도 꼭 하고 와야 상쾌하다. 근력 운동을 할 땐 한정된 기구 대비 많은 회원 수를 감안해 어느 정도 순서를 바꾸는 건 납득하지만 최대한 안 바꾸게끔 사용해야 할 기구를 지켜보며 틈을 노리다 자리가 비는 순간을 매처럼 낚아챈다. 마음먹었던 중량과 세트 수는 관절에 무리가 가지 않는 이상 지키려 하고, 하루 근력 운동의 총 세트 수는 최소 14세트에서 최대 18세트여야 한다. 여기에서 벗어나면 아무리 땀을 흘려도 개운하지가 않다. 그래, 나는 빼도 박도 못하고 그냥 J 그 자체다!


어쩌면 이건 통제 욕구에서 비롯된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뭐든 자기 뜻대로 통제할 수 있길 바라고, 그것을 하나의 권력으로 치부한다. 내 삶조차 뜻대로 어찌할 수 없는 세상 속에서 생판 모르는 남을 통제하기 위해 가스라이팅은 물론 폭력까지 쓰는 마당에, 내가 하는 행위를 통제하고 만족감을 얻는 것만큼 건전하고 좋은 일이 없겠지.(물론 적당히 했을 경우에 국한된 이야기다. 스스로를 과도하게 통제하고 규칙을 세워 억압하면 욕구불만, 강박증, 염려증을 유발해 정신적 괴로움을 느낄 수 있다) 통제를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꾸준히 무언가를 성취할 수 있고,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라고 자문하는 물음이 부질없다고 단칼에 대답할 수 있다. 루틴은 그런 거니까. 한편으론 이 모든 걸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자체가 운동에 대한 욕심이 커지고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일상의 다른 부분에서는 이 정도로까지 노력하지 않는데 운동을 할 때만 유독 그런 분노(?)를 느낀다는 건 이 영역에서 잘하고 있는 나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고, 지켜가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가 아닐까.


사람들이 “너 J야? “라고 다시 묻는다면 ”어, 맞아.”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는 명백한 일면을 찾고 말았다. 솔직히 J건 아니건, 그냥 나란 사람의 일부가 어떤 면에 있어서는 계획과 스스로 정한 루틴, 규칙대로 살길 원한다고 얘기하는 게 더 맞을 것도 같다. 그게 어떤 부분이냐고 묻는다면 이 글에 쓰인 운동 습관과 거기에 따라 달라지는 감정 상태를 이야기해 줘야지. 그럼 아마 다들 별말 없이 납득할 것 같다. 아니, 쟤 완전 운동에 지독하게 빠져든 사람이라고 생각할까? 뭐가 됐든 둘 다 오케이다, 그건 사실이니까!


tempImageGKuAeJ.heic 루틴은 중요하기 때문에 30분 하기로 했으면 1초라도 더 넘기고 싶지 않다(?).


Back in the days 8.

일로 우울감 해소하기

별 다섯 개 만점에 세 개, “이게 누굴 위한 삶이야”

장점: 이전과 같은 일을 하더라도 몰입도가 강해지기 때문에 생산성이 높아진다. 회사 내에서 인정받을 수 있고 잘하면 인센티브 등 부가요소를 기대해 볼 수 있다. 우울을 일로써 승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우울 해소 방법으로서는 상위 단계라 할 수 있겠다.

단점: 일에 필요 이상으로 몰두하게 되어 주위 동료들까지 힘들게 만들 수 있다. 일을 하다가 가끔씩 정신을 차려보면 ‘이게 누굴 위한 건가’, ‘본질적인 문제를 회피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회의감이 몰려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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