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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er Lucy Dec 22. 2023

12월 22일 모닝페이지. 그분이 또 오셨습니다.

반갑지도 않은데 왜 꼬박꼬박 오고 그러세요.

기상 시간 8시 7분. 몸이 무겁다.


일어나자마자 기분이 좋지 않다. 아니, 좋지 않다는 말로 부족하다. 거지 같고 화나고 베개를 퍽퍽 내리치고 싶을 정도다. 오늘따라 제대로 개어지지 않는 이불도 꼴 보기 싫고 거울 속에 비친 몰골은 더 그렇다.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다. 그때가 도래했을 뿐이다. 


생리전증후군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갑자기 식욕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짜고 단 음식을 잘 먹지 않았던 사람들도 떡볶이와 초콜릿을 갈망하게 되며 뭐라도 쥐어패고 싶은 폭력성이 생긴다고. 사람마다 강도는 다르다고 하는데 나는 폭력성과 식욕, 우울감과 지랄 맞음이 똘똘 뭉쳐진 핵융합폭탄이 된다. 이럴 때 우스갯소리로 자주 하는 말이 있는데, 만일 전쟁 때 생리전증후군을 맞은 여성들을 용병으로 삼았으면 그 누구보다 잔인하고 맹렬하게 적과 싸웠을 거라고. 한 마디로 이 시기에 그들은 원래 그가 누구였건간 그 사람이 아니게 된다는 말이다. 인간의 잔혹함을 보고 싶으면 이때 여자를 건드려봐라. 


내가 보기에 생리전증후군의 모습을 제일 잘 그린 쉬케치 영상...


차라리 폭력적인 부분만 있다면 방에서 혼자 베개를 상대로 스파링을 하거나 헬스장에 가서 50kg 바벨과 싸울 텐데 가장 큰 적은 바로 우울감이다. 심리학에서도 여성 우울증 중에 흔히 꼽는 게 생리전 우울증이라고 하니. 심각하면 자살, 자해까지 시도하게 만드는 중증 우울감을 느끼게 된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호르몬님의 자비와 은총을 받아 우울감이 두 달에 한 번씩 오는 편인데(안 온다고 하진 않았다) 그 정도가 매우 극심하다. 모든 의욕이 없어지고 살아온 삶에 대한 회의감이 태풍처럼 몰려온다. 화를 내는 건 어느 정도 활기가 잔존한다는 건데, 우울은 정말 답이 없다. 모든 게 부질없고 한심스럽게 느껴지는 사람에게 떡볶이랑 초콜릿을 들이대봐야 소용없단 얘기다. 


이 짓을 10년 이상 반복하고 나니 나름 노하우가 생기긴 했다. 첫째, 절대 이 기간에 중요한 결정을 내리지 말 것. 둘째, 이 시기의 나도 나의 일부이긴 하지만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할 것. 셋째, 이 시기엔 되도록 욕구불만의 상태가 될 때까지 절제하거나 제지하려 들지 말 것.(예를 들어 떡볶이가 먹고 싶으면 참지 말고 그냥 먹어라. 지금 안 먹는다고 아예 안 먹는 것도 아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건 두 번째다. 우울감이 극심해지면 해온 노력들과 무관하게 삶을 통째로 부정하고 쓰레기통에 버릴 것처럼 굴게 되는데, 지금 잠깐의 시기만 이럴 뿐 그게 진짜는 아니라고 계속 주지 시켜주어야 한다. 


생리전증후군 뿐 아니라 생리 때문에 고통받은 경험은 아마 다들 있으시겠지. 학교 다닐 때를 생각해 보면 극심한 생리통 때문에 바닥에 배를 잡고 뒹구는 친구들도 허다했고, 들쭉날쭉하는 생리 주기 때문에 우울해하는 친구들도 꽤 많았다. 생각해 보면 여성이라는 성별이 존재한 이래 생리는 분명 함께 존재했을 텐데 아직도 생리통이나 생리전증후군 등 생리와 관계된 여러 증상 혹은 문제들에 대한 폭넓은 연구가 없다는 게 어이가 없고. 생식 능력은 차치하고 한 달의 반 이상을 생리전증후군과 생리통으로 보내야 하는 삶은 정말 별로다. 생리대 가격은 또 얼마나 비싼지. 예전에 스위스 가서 제일 놀랐던 점 중 하나는 생리대 가격이 엄청 쌌던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도 물가가 미쳤다고 표현되는 스위스에서도 거의 유일하게 싼 게 생리대였는데, 한국은 유해물질까지 있다면서 비싸긴 오죽 비싼가. 오죽하면 가난한 여성 청소년들이 생리대 대신 신발깔창을 쓴다고 하나. 


생리에 대해서는 할 말이 오백 천만억조 개다. 왜 아직도 '생리한다'라고 대놓고 말할 수 없는지, 생리대는 파우치에 담아 화장실로 가져가야 하는지, 왜 아직도 생리전증후군의 정확한 원인에 대해 연구결과가 나오지 않은 건지, 생리대를 축축하지 않게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은 진짜 없는 건지. 그나마 요즘에는 유튜버들이 본인들 콘텐츠에서 자연스럽게 생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분위기가 됐지만 아직 갈 길은 한참 멀다. 2023년인데 아직도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제자리걸음도 못 떼고 있으니. 누굴 위한 사회 발전이야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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